
중동 전쟁 장기화로 국내 원유 수급에 비상등이 켜졌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국내 정유사들의 주요 원유 공급로가 막힌 가운데, 현재 해협에 발이 묶인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만 7척에 달하며 총 1천400만배럴 규모의 원유가 국내 도착을 못하고 있다.
사태가 장기화 국면으로 접어들자 정부가 전례 없는 ‘비축유 스와프(SWAP) 제도’를 꺼내 들었다. 산업통상자원부 양기욱 산업자원안보실장은 31일 정부세종청사 중동 상황 대응본부 브리핑에서 이날부터 해당 제도를 시행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비축유 ‘방출’이 아닌 ‘교환’…재고 소진 없는 구조 설계
비축유 스와프 제도는 기존의 비축유 방출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정유사가 아프리카, 미주, 호주 등 대체 산지에서 원유를 확보하고 선적 서류를 제출하면, 산업부와 한국석유공사가 타당성을 검토한 뒤 정부 비축유를 먼저 빌려주는 방식이다.
이후 대체 물량 선박이 국내에 도착하면 석유공사 비축 기지에 동일 물량을 상환한다. 정유사가 대체 물량을 반드시 확보해야만 비축유가 지급되는 구조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정부의 비축유 재고는 소진되지 않는다.
업계 관계자들은 이 구조가 정유사의 대체 물량 확보 노력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면서도 에너지 안보를 유지하는 이중 안전장치라고 평가한다. 특히 중동산 원유 도입을 전제로 블렌딩 설비를 갖춘 국내 정유사 입장에서는 정부가 보유한 중동산 비축유를 먼저 꺼내 쓰고 나중에 타 지역 원유로 반납할 수 있어 활용 유인이 크다는 분석이다.
미국산 원유, 도착까지 50일…시간 차이가 핵심 문제
이번 제도 도입의 핵심 배경은 대체 원유의 물리적 도입 시간 격차다. 원유를 계약하고 선적해 국내에 도착하기까지 호주산은 14일, 중동산은 20일인 반면, 미국산은 최대 50일이 소요된다.
정유사들이 대체 공급처 확보에 나서더라도 실제 원유가 국내 제련소에 투입되기까지 수십 일의 공백이 발생한다. 이 공백기 동안 석유제품 생산 차질이 빚어질 수 있는 만큼, 정부가 비축유를 먼저 빌려주는 방식으로 시간 차이를 메우겠다는 취지다.
정산 가격은 비축기지 기본 대여료에 비축유 월평균 현물 가격과 대체 물량 실제 구매가격의 차액을 더해 월말에 사후 정산한다. 예를 들어 가격이 급등한 중동산 원유를 비축유로 먼저 제공받고 추후 미국산 원유로 상환할 경우, 두 원유의 가격 차액만큼을 추가 부담하는 구조다.
정유 4사 모두 신청…6월까지 수급 문제없다
사전 수요 조사에서 국내 정유 4사가 모두 제도 활용 의사를 밝혔으며, 4~5월 신청 가능 물량은 총 2천만배럴을 넘는 것으로 집계됐다. 31일 현재 1개 정유사가 200만배럴 규모의 첫 스와프 계약 절차에 착수한 상태다.
제도는 4~5월 2개월간 우선 시행된 뒤, 산업부 장관 승인을 거쳐 1개월씩 연장할 수 있다. 정부가 보유한 중동산 비축유는 2천만배럴 이상으로 파악돼 신청 물량을 소화하는 데 문제가 없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양기욱 실장은 “6월까지 비축유 방출을 포함해 국내 원유 수급에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면서도 “기업들의 대체 물량 확보 역량과 중동 사태의 진전 여부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산업부는 헬륨, 브롬화수소, 황산, 에틸렌 등 주요 석유화학 제품의 상반기 수급은 안정적으로 유지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으며, 수액포장제 등 보건·의료 필수 원료에 대해서는 3개월치 수급 안정 조치와 매점매석 금지 등 추가 대응책도 병행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