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전쟁’ 한복판에 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패권 다툼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미국이 중국을 겨냥한 초강력 제재 카드를 꺼내들면서 한국의 반도체 기업들이 예상치 못한 난관에 봉착했다.

미국 상무부는 2일 인공지능(AI) 개발의 핵심 부품인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출을 전면 통제하는 강력한 조치를 발표했다. 이는 중국의 AI 기술 발전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지만,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게도 일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번 조치는 이미 위기에 직면한 삼성전자에게 더욱 뼈아픈 소식이다. 삼성전자는 올해 스마트폰과 PC 수요 감소로 인한 실적 부진, HBM3E 사업화 지연, SK하이닉스와의 기술 격차 확대 등 여러 도전과제에 직면해 있다. 여기에 이번 미국의 수출 통제까지 더해지면서 불확실성이 한층 더 커지게 됐다.

美 수출 통제, 일본 등 33개국은 제외

미국이 내세운 새로운 규제의 핵심은 평방밀리미터당 초당 2기가바이트(GB)보다 높은 성능의 HBM 제품에 대한 수출 통제다. 이는 현재 생산되는 대부분의 HBM 제품이 해당된다. 상무부는 해외직접생산품규칙(FDPR)을 적용해 미국 기술이 조금이라도 들어간 제품은 모두 통제 대상에 포함시켰다. 이는 반도체 산업의 특성상 사실상 모든 제품이 규제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번 조치는 우리의 적들이 우리의 기술을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방식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제이크 설리번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의 발언은 미국의 단호한 의지를 보여준다. 여기서 ‘적’이라는 표현은 중국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것이지만, 의도치 않게 한국 기업들도 그 영향권에 들어서게 됐다.

당장 삼성전자는 중국에 대한 HBM 수출이 제한될 것으로 보인다. 비록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다고는 하지만, 성장 가능성이 큰 중국 시장에서의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 SK하이닉스는 현재 HBM을 전량 미국에 수출하고 있어 직접적인 영향은 적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장기적으로는 글로벌 HBM 시장 자체가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더욱 염려되는 것은 이번 조치가 단순한 수출 통제를 넘어 글로벌 반도체 산업의 지형을 바꿀 수 있다는 점이다. 미 상무부는 자국과 동등한 수준의 수출통제 체계를 갖춘 국가들에 한해, 해당 국가 기업들이 중국으로 반도체 장비를 수출할 때 별도의 허가 절차를 면제해주기로 했다.

이에 따라 일본, 네덜란드 등 33개국에 대해서는 수출 허가 면제 혜택을 받게 되었으나, 한국은 이 대상 국가 명단에서 제외됐다.

다만 한국 정부는 그동안 미국의 요청에 따라 대중국 수출통제 참여를 적극 검토하며 관련 제도를 정비해왔기에, 향후 미국이 제시한 기준을 충족하게 되면 수출 허가 면제 국가 목록에 포함될 가능성도 열려있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정부가 수출통제 제도를 정비해 미국이 제시한 기준을 충족하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질 때까지 한국 기업들은 불확실성 속에서 경영을 이어가야 하는 상황이다.

현재로서는 한국 기업들의 피해가 제한적일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하지만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이 더욱 격화될 경우, 추가적인 규제 강화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삼성전자의 경우 현재의 경영 위기를 극복하면서 동시에 이러한 지정학적 리스크에도 대응해야 하는 이중고에 직면해 있다.

향후 글로벌 반도체 산업의 판도 변화가 예상되는 가운데, 한국 기업들의 전략적 선택이 주목된다. 단기적으로는 미국의 규제를 준수하면서도 중국 시장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균형점을 찾아야 하고, 장기적으로는 기술 경쟁력 강화를 통해 독자적인 입지를 다져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