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년 이상 거래를 이어온 하청업체와의 계약이 하루아침에 종료되고, 소속 노동자 120명 전원이 일괄 해고 통보를 받았다. 사건의 발단은 노조 설립이었다. 한국GM 세종물류센터에서 벌어진 이번 집단해고 사태는 원청 기업의 책임 범위와 하청노동자의 권리 보호 문제를 다시 한번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2025년 11월 28일, 한국GM은 우진물류와의 도급계약 해지를 통보하며 소속 하청노동자 전원을 해고했다. 노동자들은 같은 해 7월 노조를 설립했고, 불과 4개월 만에 일자리를 잃게 됐다. 46일간의 점거농성 끝에 지난 5일 노사는 고용승계를 보장하는 잠정 합의안을 도출했다. 조합원 총회에서 96명 중 95명이 투표해 찬성 74표, 찬성률 77.89%로 가결됐다.
이번 사태는 단순한 하청업체 교체를 넘어 노조 탄압 의혹과 원청의 책임 회피 논란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20년 이상 하청업체가 여러 차례 바뀌었음에도 고용승계가 유지돼온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노조 설립 4개월 만에 계약 해지, 원청 압박 정황 포착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든 이유는 단순했다. 호봉 인정과 한국GM 정규직 수준의 임금 인상, 그리고 육아휴직 등 장기 결원 시 대체 인력 5명 충원이 주요 요구사항이었다. 금속노조와 우진물류는 실무교섭에서 인력 충원에 합의했지만, 우진물류는 돌연 “한국GM과 협의 중”이라며 이행을 거부했다. 교섭 과정에서 하청업체 측은 “원청이 반대한다”, “원청 허락이 있어야 한다”는 말만 반복했다.
노조 설립 초기부터 우진물류는 조합원들에게 “노조 만들면 폐업되고 외주화된다”며 협박했다. 한국GM 임원은 면담에서 올해 하청업체 계약이 문제없이 진행될 것이라 호언장담하며 파업 철회를 압박했으나, 노조가 쟁의에 돌입하자 2025년 11월 20일 발탁채용 카드를 꺼냈다. 8일 후 계약 해지 통보가 이어졌다.
“세종→부평 발령” 선별 채용 제안, 불법파견 책임 회피 논란
한국GM은 정규직 채용 기회를 제안했다고 밝혔지만, 내용은 달랐다. 세종에서 3시간 가까운 거리의 부평·창원으로의 배치 전환과 20년 가까이 수행하던 물류 업무가 아닌 제조 라인 투입이 조건이었다. 노조는 이를 “선별 채용과 타지역 전환 배치를 요구하는 불법파견 책임 회피 꼼수”라고 반발했다.
한국GM은 초기 “신규 계약사의 고용 승계 여부는 해당 업체의 독립적인 경영 판단 사항으로, 원청이 개입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하지만 노동 당국의 중재 하에 원청사로서의 책임을 인정하고 입장을 바꿨다. 세종물류센터는 한국GM의 유일한 정비 부품 공급 기지로, 46일간의 농성으로 현장에서 부품 공급 대란이 발생한 것도 합의를 이끌어낸 배경으로 분석된다.
하청노동자 권리 보호, 법적 장치 마련 시급
노동법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을 원청 책임 강화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하청업체 교체 시 노동자의 고용을 보장하는 법적 장치가 미비한 상황에서, 원청 기업이 도급계약 해지를 통해 사실상 집단해고를 주도할 수 있다는 점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전국금속노동조합은 “과거 물류업체 계약이 종료되더라도 노동자의 고용을 승계해온 전례가 있고, 노조 설립 직후 집단해고가 벌어진 것은 노조 파괴 목적의 부당노동행위”라고 규정했다.
이번 합의로 세종물류센터 하청노동자들은 도급업체가 바뀌어도 같은 노동조건으로 고용승계를 보장받게 됐다. 노조는 9일 오후 5시 물류센터에서 투쟁 승리 보고대회를 열 예정이다. 46일간의 긴 싸움은 끝났지만, 전국 수십만 하청노동자들의 권리 보호를 위한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