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막아선 채 세계 에너지 교역을 인질로 삼고 있다. 그런데 전쟁을 시작한 미국이 해협을 다시 열지 않은 채 작전을 끝낼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무력을 앞세워 갈등을 촉발하고 뒷수습은 타국에 떠넘기는 구도가 굳어지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30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이 호르무즈 해협이 폐쇄된 상태에서도 이란에 대한 군사 작전을 종료할 의사를 참모들에게 밝혔다고 보도했다. 마코 루비오 국무부 장관도 같은 날 알자지라 인터뷰에서 군사 작전이 수주 내 완료될 것이라고 인정하면서, 해협 개방 문제는 “이란이 결정해야 할 사안”이라고 선을 그었다.
핵심 목표는 ‘이란 군사력 약화’, 해협 개방은 후순위
트럼프 행정부의 전략은 명확하다. 이란의 해군 전력과 미사일 능력을 타격한 뒤 작전을 축소하고, 해협 재개방은 외교적 압박과 동맹국 주도로 해결한다는 구상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제시한 작전 기간은 4~6주다.
미국이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 임무까지 떠맡을 경우 이 기간을 초과한다는 판단이 이 같은 결정의 배경으로 작용했다. 외교적 압박이 실패하면 미국은 유럽과 걸프 지역 동맹국들에게 해협 개방을 주도하라고 압박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진다.
하루 2천만 배럴·세계 LNG 교역 19%…해협 폐쇄의 파장
호르무즈 해협은 아라비아반도와 이란 사이에 위치한 전략 요충지로, 가장 좁은 지점의 폭이 54km에 불과하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2025년 기준 하루 평균 2천만 배럴의 원유와 석유제품이 이 해협을 통과했으며, 이는 세계 해상 원유 교역의 약 25%에 해당한다.
아시아 국가들의 타격이 특히 크다. 해협을 통과하는 원유의 80%가 아시아행이다. 카타르와 UAE가 수출하는 LNG의 90% 이상도 이 해협을 경유하는데, 이는 세계 LNG 교역의 19%에 달한다. 한국은 수입 원유의 약 60%를 호르무즈 통과 물량으로 조달하며,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취약성을 보인다. HD오일뱅크, GS칼텍스 등 소속 유조선 7척이 해협에 발이 묶인 상태다.
이란은 2026년 2월 28일 혁명수비대(IRGC)를 통해 해협 폐쇄를 공식 선언했다. 같은 날 미국-이스라엘 공동 군사작전 ‘오퍼레이션 에픽 퓨리(Operation Epic Fury)’가 개시됐다. MSC, CMA CGM, HMM 등 주요 해운사들은 즉각 중동행 화물 예약을 중단하고 아프리카 희망봉 경유 우회 노선으로 전환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책임”…전문가들의 경고
브루킹스연구소의 이란 전문가 수잔 멀로니는 호르무즈를 개방하지 않은 채 전쟁을 끝내는 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책임하다”고 직격했다. 그는 “에너지 시장은 선천적으로 글로벌하다”며 “해협 폐쇄가 계속되면 미국도 경제적 피해로부터 격리될 수 없다”고 경고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태도도 일관성을 잃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는 이전에 “호르무즈는 미국에 중요하지 않으며, 다른 나라들이 해결할 문제”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면서도 30일 트루스소셜에는 합의 불발 시 “이란의 발전소, 유정, 하르그 섬을 폭파하고 완전히 초토화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 이중적 메시지는 정책 신뢰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