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원유·LNG 공급량의 20%가 오가던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이란의 관할 수로로 변모하고 있다. 이라크와 파키스탄이 이란과 잇달아 양자 협정을 체결하고 에너지 운송로를 개별적으로 확보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다.
로이터통신은 12일(현지시간), 이라크가 이란과의 합의를 통해 각각 200만 배럴의 원유를 실은 초대형 유조선 두 척의 안전 통항을 보장받아 10일에 해협을 무사히 통과시켰다고 보도했다. 파키스탄 역시 별도 협정을 체결해 카타르산 LNG를 실은 유조선 두 척이 현재 파키스탄을 향해 항해 중이다.
월 3,000척에서 150척으로…해협의 ‘적막’
전쟁 발발 이전,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은 월평균 3,000척에 달했다. 현재는 그 20분의 1인 약 150척 수준에 그친다. 사실상 ‘선택받은 선박’만 통과하는 구조로 바뀐 셈이다.
에너지 가격은 이미 급격히 반응했다. 북해산 브렌트유는 전쟁 발발 이후 50% 넘게 올랐고, 유럽과 아시아의 LNG 가격은 35~50% 상승했다. 여름 냉방 수요 시즌을 앞두고 화석연료 수입이 절실한 파키스탄의 경우, 전쟁 전에는 매월 약 10척 분량의 LNG를 수입했으나 현재는 협정 체결로 겨우 두 척을 확보한 상태다.
이라크의 상황은 더욱 절박하다. 이라크 정부 예산의 95%가 석유 수익으로 충당되기 때문이다. 이라크 석유부 관계자는 로이터에 “이라크 경제의 악화는 이란의 이라크 내 경제적 이익에도 타격을 줄 것”이라며 협정의 배경을 설명했다.
통행료 없이 통제하는 이란의 방식
주목할 점은 이란이 직접적인 통행료를 받지 않으면서도 실질적인 통제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로이터 취재원들은 이라크와 파키스탄 모두 이란 정부나 이슬람혁명수비대(IRGC)에 직접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대신 이란은 통과를 원하는 선박에 목적지, 화물 내역, 소유관계 등 상세 서류 제출을 요구하고, 이란 해군의 감독 아래 지정된 해상 경로만을 이용하도록 강제하는 방식으로 통제를 공식화하고 있다. 국제 공해를 일방적 관료 절차로 묶어두는 구조다.
카타르는 이번 양자 협정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으나, 파키스탄행 LNG 선적 전에 미국 측에 이를 사전 통보한 것으로 업계 취재원 두 명은 전했다.
‘정상화’를 우려하는 시장
에너지 업계와 시장 분석가들은 이 같은 흐름이 고착화될 경우 더 심각한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컨설팅업체 MST 마키의 사울 카보닉 조사본부장은 “해협 통과를 위해 이란과 거래하려는 정부가 늘어날수록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영구적으로 통제한다는 발상이 정상화될 위험이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이라크, 파키스탄 외 다수 국가가 유사한 협정 체결을 이란과 협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별 국가들이 이란의 승인을 받아 해협을 통과하는 관행이 반복될수록, 국제법상 자유로운 통항이 보장되어야 할 공해에서의 이란의 일방적 통제가 사실상 공인되는 국면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것이 업계의 분석이다.
미·이란 핵 협상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에너지 공급망의 불안이 장기화될 경우, 유럽과 아시아 전역의 인플레이션 압력을 재점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