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아가 2030년까지 역대 최대 규모인 49조 원을 투자하는 중장기 전략을 공개했다. 전기차 캐즘과 통상 불확실성이라는 역풍 속에서도 미래 경쟁력 확보에 공격적으로 베팅한 것이다.
9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2026 CEO 인베스터 데이’에서 공개된 이번 전략은 수익성 중심의 현실적 조정과 미래사업 선제 투자라는 두 축으로 구성된다. 자동차 시장의 지각변동이 가속화되는 시점에서 기아가 선택한 길이 무엇인지 주목된다.
역대 최대 49조 원 투자…미래사업에 42.9% 집중
이번 5개년 투자 계획(2026~2030년)의 총 규모는 49조 원으로, 직전 계획(2025~2029년, 42조 원)보다 7조 원 증가한 것이다. 기아가 발표한 5개년 계획 중 사상 최대 규모다.
주목할 대목은 투자 구조다. 전체 49조 원 가운데 전동화·자율주행·로보틱스 등 미래사업에 배정된 금액이 21조 원으로, 전체의 42.9%에 달한다. 단순한 생산 설비 확충이 아니라 사업 구조 자체를 바꾸겠다는 의지를 수치로 드러낸 것이다.
재무 목표도 구체적이다. 2028년 매출 150조 원·영업이익률 9%를 중간 목표로 설정하고, 2030년에는 매출 170조 원, 영업이익 17조 원(이익률 10%)을 달성한다는 계획이다. 지난해 실적(매출 114조 원, 영업이익 9조 원) 대비 각각 49%, 89% 향상된 수치다.
판매 목표 현실화…파워트레인 다각화로 돌파구
기아는 2030년 글로벌 판매 목표를 종전 419만 대에서 413만 대로 6만 대 하향 조정했다. 전기차 캐즘 심화, 주요 지역 보조금 축소, 미국 관세 부담 등 외부 변수를 반영한 현실적 수정이다.
다만 시장점유율 4.5% 목표는 유지했다. 파워트레인별로는 내연기관차 198만 대, 하이브리드차(PHEV·EREV 포함) 115만 대, 전기차 100만 대로 구성된다. 눈에 띄는 것은 하이브리드 전략이다. 수요 확대에 맞춰 2030년까지 생산 능력을 40만 대 추가 확보하고, 라인업을 13개 모델로 운영한다. 전기차 캐즘 속에서 하이브리드가 수익성 방어의 핵심 교두보로 자리잡는 구조다.
지역별 전략도 차별화된다. 미국에서는 하이브리드 라인업을 기존 4개에서 8개 모델로 확대해 102만 대(점유율 6.2%) 판매를 목표로 한다. 유럽에서는 전기차 판매 비중을 66%로 설정해 74만 6천 대(4.8%) 달성을 노린다. 인도를 중심으로 한 신흥시장에서는 2025년 대비 50% 성장한 148만 대(6.6%) 판매를 추진한다.
자율주행·로보틱스…모빌리티 기업으로의 변신
기아의 미래사업 투자 중 가장 주목되는 분야는 자율주행과 로보틱스다. 내년 말까지 고속도로 레벨2+ 자율주행을 탑재한 첫 SDV(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 모델을 개발하고, 2029년 초에는 도심 환경에서도 작동하는 레벨2++ 기술을 적용할 계획이다.
로보틱스 분야에서는 현대차그룹 계열사 보스턴다이내믹스의 로봇 자산을 적극 활용한다. 4족 보행 로봇 ‘스팟’과 물류형 로봇 ‘스트레치’를 목적기반모빌리티(PBV) 차량과 결합해 연간 2천880억 달러(약 426조 원) 규모로 추산되는 라스트마일 딜리버리 시장을 공략한다.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는 2029년 하반기 조지아 공장(KaGA)에 최초 투입된 뒤 글로벌 공장으로 단계적으로 확대된다.
전기차 플랫폼도 고도화된다. 차세대 EV 플랫폼을 통해 배터리 용량 최대 40% 확대, 모터 출력 9% 향상, 5세대 배터리 도입(에너지 밀도 최대 15% 향상)을 추진한다. 충전 인프라는 북미 24만 기, 유럽 100만 기, 국내 48만 기 수준을 확보하고 지속 확장할 방침이다.
기아의 이번 전략은 불확실한 시장 환경 속에서도 수익성을 지키면서 미래 경쟁력을 동시에 챙기는 ‘투트랙 포지셔닝’이다. 판매 목표를 현실에 맞게 낮추는 한편 49조 원이라는 사상 최대 투자를 단행한 것은, 지금의 체력을 바탕으로 2030년 이후 판도를 선점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전기차 캐즘과 관세 변수라는 외풍이 거센 만큼, 이 청사진이 현실이 될 수 있을지는 앞으로 5년이 증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