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차그룹이 ‘완성차 제조사’라는 틀을 스스로 깨고 있다. 정의선 회장은 12일(현지시간) 미국 온라인매체 세마포와의 인터뷰에서 로보틱스와 피지컬 AI를 그룹 미래 성장의 핵심축으로 재확인하며, 2028년까지 미국에 총 260억 달러(약 38조원)를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공식화했다.
이는 현대차그룹이 1986년 미국 시장에 진출한 이후 40년간 누적 투자한 205억 달러를 단 4년 만에 훌쩍 뛰어넘는 규모다. 단순한 생산 확충이 아닌, 미국 시장의 주도권을 새롭게 정의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다.
아틀라스, 공장 바닥을 바꾼다
정 회장은 올해 1월 CES에서 발표한 ‘인간 중심 AI 로보틱스 전략’을 구체화하며, 2028년까지 보스턴다이내믹스의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를 실제 생산 공정에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현대차그룹은 2030년까지 연간 최대 3만 대 규모의 아틀라스 생산 체계를 구축할 계획이다.
투입 일정도 구체적이다. 2028년 HMGMA(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를 시작으로, 2029년 하반기에는 기아 조지아 공장에도 아틀라스가 배치된다. 제조 현장 16개 프로세스를 대상으로 하며, 구글 딥마인드·엔비디아와의 피지컬 AI 인프라 협력을 통해 기술 생태계를 확장한다.
연간 3만 대는 현대차그룹 연간 완성차 생산량(약 350만 대)의 1% 미만으로, 초기 파일럿 규모에 해당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타임라인과 공장별 배치 계획은 상용화 가능성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는 근거가 된다.
260억 달러, 어디에 쓰이나
미국 투자 260억 달러의 배분 구조를 보면 전략의 우선순위가 명확히 드러난다. 현지 생산 능력 확대에 120억 달러, 루이지애나 신규 제철소 및 공급망 구축에 70억 달러, 자율주행·로보틱스·AI 기술개발에 70억 달러가 각각 배정됐다.
현지 생산 확대는 미국 IRA(인플레이션 감축법) 등 산업정책 변화에 대한 선제 대응이기도 하다. 동시에 국내에서는 2026년부터 2030년까지 총 125조원을 투자하며, 미래사업군(자율주행·로보틱스·SDV·수소에너지)에만 50조5천억원을 집중 배분한다.
정 회장은 지정학적 불확실성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글로벌 확장과 현지화의 동시 추진’을 제시했다. 한국 생산기지, 미국 HMGMA, 인도 및 아시아태평양 신규 생산 거점 등 다층적 공급망을 구축해 특정 지역 리스크를 분산하겠다는 구조다.
수소, AI 시대의 새로운 에너지 카드
정 회장은 수소 사업에서도 주목할 만한 시각을 제시했다. AI 인프라와 데이터센터 확산으로 에너지 수요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수소가 핵심 대안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수소 사업 브랜드 ‘HTWO’를 중심으로 생산·저장·운송·활용을 아우르는 전 밸류체인 구축이 현재 진행 중이다.
그는 “수소는 전기차와 경쟁 관계가 아닌 보완적 기술”이라고 선을 그었다. 다양한 에너지 선택지를 고객에게 제공하는 것이 에너지 전환 시대의 진정한 경쟁력이라는 논리다. 차량 생산뿐 아니라 원자재 조달·공정·재활용 전 과정에서 넷제로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도 함께 제시됐다.
현대차그룹은 현재 현대차·기아·제네시스 브랜드를 통해 연간 700만 대 이상의 차량을 판매하며, 200개국에 걸친 판매망과 16개 글로벌 생산시설을 보유하고 있다. 완성차 제조의 탄탄한 기반 위에 피지컬 AI와 로보틱스, 수소를 새로운 성장 축으로 얹는 전략이다. 2030년을 향한 현대차그룹의 변신은 이미 시작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