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계좌에 반도체 대장주를 100% 담는 방법이 있다면? 자산운용업계가 그 해법을 ETF 시장에서 찾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두 종목에 집중하면서도 채권을 절반 섞어 ‘안전자산’으로 분류되는 채권혼합형 ETF가 투자자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22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KB자산운용이 올해 2월 출시한 ‘RISE 삼성전자SK하이닉스채권혼합50 ETF’는 지난 20일 기준 순자산 1조원을 돌파했다. 국내 채권혼합형 ETF 사상 최단기간 1조원 돌파 기록으로, 자금 유입 속도가 이례적으로 빠르다는 평가다.
이 상품의 흥행을 신호탄으로 삼성자산운용, 키움투자자산운용, 하나자산운용 등이 유사한 구조의 상품을 잇따라 출시하면서 시장 내 경쟁이 빠르게 달아오르고 있다.
채권 50%가 만든 ‘퇴직연금 틈새’
이들 상품의 구조는 단순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각각 약 25%씩 투자하고, 나머지 50%는 국고채·통안채 등 국내 우량 채권으로 채운다. 성장성과 안정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자산배분 전략이다.
핵심 매력은 퇴직연금 규정에 있다. 퇴직연금 계좌는 주식 비중이 높은 위험자산을 최대 70%까지만 편입할 수 있다. 그러나 채권 비중이 50%를 넘는 채권혼합형 상품은 ‘안전자산’으로 분류돼 계좌의 100%까지 담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 투자자는 퇴직연금 계좌 전체를 사실상 반도체 집중 투자에 활용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코스피에서 제일 주목받는 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인데, 장기적으로 투자하고 퇴직연금에 온전히 담고 싶은 투자자 니즈를 반영해 시의적절하게 잘 연결한 것 같다”고 말했다.
커버드콜·레버리지까지… 상품 다양화도 가속
채권혼합형에만 수요가 몰리는 것은 아니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은 21일 국내 대표 반도체 기업에 집중 투자하면서 개별 종목 콜옵션을 직접 활용하는 커버드콜 전략을 결합한 ‘TIGER 반도체TOP10커버드콜액티브 ETF’를 선보였다. 반도체 산업의 성장성과 월 단위 현금흐름을 동시에 추구하는 구조다.
한국투자신탁운용은 SK하이닉스, 삼성전자, 한미반도체 3개 종목에 약 75%를 압축 투자하는 ‘ACE AI반도체TOP3+ ETF’를 운용 중이다. 삼성자산운용은 지난 7일 삼성전자·SK하이닉스 각 25%, 국내 우량 채권 50%로 구성된 채권혼합형 ETF를 추가 출시하며 KB자산운용의 시장 선점에 본격 도전장을 내밀었다.
AI 수요가 반도체 집중투자 논리 만든다
이 같은 상품 출시 러시의 배경에는 반도체 산업에 대한 구조적 낙관론이 자리 잡고 있다. KB증권은 글로벌 에이전틱(Agentic) AI 시장이 2025년 75억달러(약 11조원)에서 2034년 1,990억달러(약 293조원)로 연평균 44% 고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에 따른 메모리 반도체의 구조적 수요 증가가 불가피하다는 분석이다.
KB증권은 “피지컬 AI 시대에서 메모리 반도체 산업은 질적 고도화와 양적 성장의 동시 국면에 진입할 것”이라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AI 산업혁명의 최대 수혜주로서 중장기 성장성이 더욱 부각될 전망”이라고 분석했다.
다만 우려의 시각도 없지 않다. 퇴직연금의 ‘안전자산 30% 규정’은 분산투자를 유도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다. 그런데 채권혼합형 ETF는 제도상 안전자산으로 분류되지만, 내부 구조의 절반가량은 변동성이 큰 주식으로 채워져 있다. 업계 일각에서는 규정의 취지와 실질 사이의 괴리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