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촉발된 국제 유가 급등 사태가 전례 없는 규모의 국제 공조로 이어지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가 3억~4억 배럴에 달하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략비축유 공동 방출을 제안하면서, 한국을 포함한 32개 회원국이 11일(현지시간) 긴급회의를 통해 최종 결정을 내릴 예정이다.
산업통상부 관계자는 11일 “우리나라도 IEA의 전략적 비축유 공동 방출 논의에 긴밀히 참여하고 있다”며 “이번 주 발표 예정인 석유 최고가격제와 맞물려 국내 유가 안정에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이 제안한 이번 방출 규모가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두 차례에 걸쳐 공급된 1억8,200만 배럴을 크게 상회한다고 보도했다.
다만 회원국 중 단 한 곳이라도 반대할 경우 계획이 지연될 수 있어, 만장일치 합의 여부가 관건이다. 프랑스는 “아직 방출 합의 단계는 아니다”라며 보수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호르무즈 위기, 2년 만에 재점화된 비축유 카드
IEA가 전략비축유 공동 방출 카드를 꺼낸 것은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공습 이후 브렌트유가 2024년 4월 이후 처음으로 급등세를 보이면서다. G7 재무장관들은 성명을 통해 “에너지 공급을 늘릴 모든 조치를 취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으며, 영국 재무장관은 IEA 비축유 공동 방출에 명시적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1973년 오일쇼크 이후 OPEC에 대응하기 위해 설립된 IEA는 회원국에 순 석유 수입량 기준 최소 90일분의 비상 석유 비축을 의무화하고 있다. 한국은 이 기준의 2배가 넘는 208일분(세계 6위 규모)을 보유 중이며, 정부 비축유만으로도 약 120일을 버틸 수 있는 물량을 확보하고 있다.
글로벌 투자은행 노무라는 이번 사태로 한국 물가상승률 전망을 2.1%에서 2.3%로 상향 조정하며 스태그플레이션 우려를 제기했다. 시장에서는 ‘CTA(상품거래자문업체)의 가격 모멘텀 강화 전략’이 유가 상승을 더욱 가속화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국, 1억 배럴 중 ‘수백만 배럴’ 방출 가능성
한국은 2월 말 기준 울산, 여수, 거제, 서산 등 전국 9개 비축기지에 1억4,600만 배럴 규모의 비축 시설을 확보하고 있으며, 실제 저장된 원유는 1억 배럴 수준이다. 정부 비축유의 약 70~80%는 정제 전 원유 형태로, 나머지는 휘발유·경유·등유·LPG 등 석유제품으로 구성돼 있다.
한국은 1990년 이후 총 5차례 비축유를 방출했으며, 모두 국제 공조를 통해 결정됐다. 2011년 리비아 사태 당시 346만 배럴(당시 비축유의 약 4%)을,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는 723만 배럴을 시장에 공급한 바 있다. 업계에서는 이번에도 과거 사례와 유사한 수준에서 방출 규모가 결정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한국석유공사는 전날 울산 본사에서 손주석 사장 주재로 석유상황실 점검회의를 열고 비축유 방출 상황에 대비한 지사별 입출하 설비 상태를 점검했다. 정부는 이와 별도로 이번 주 석유 최고가격지정제를 시행할 계획으로, 국제 시세에 일정 마진을 더해 정유사의 공급가 상한선을 정하는 방식이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다.
“시간 버는 수단”…근본 해법은 별도 필요
전문가들은 비축유 방출의 효과를 인정하면서도 한계를 동시에 지적하고 있다. 에너지경제연구원 장태훈 연구위원은 “비축량을 푸는 순간 대응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 없기 때문에 비축유 방출은 최대한 안 하는 것이 맞다”고 경고했다.
특히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장기화될 경우 대체 도입선 확보 자체가 막히면서 비축유 방출만으로는 산업 가동률 유지가 불가능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비축유는 “구조적 해법이 아닌 시간을 버는 수단”이라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단기 대응책과 함께 근본적 해법 마련에도 나서고 있다. 미국산 원유·LNG 수입 확대, UAE와의 국제공동비축사업 활용(600만 배럴 추가 공급 예정), 호르무즈 해상 호위 작전 동참 등이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