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원 환율이 4일 새벽 야간 거래에서 1,500원 선을 넘어서며 2009년 3월 이후 17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전날 종가 대비 46원이나 급등한 1,485.70원에 장을 마감했고, 장중 한때 1,506.50원까지 치솟았다. 상승 폭 기준으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64.80원) 이후 가장 크다.
촉발점은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였다. 3월 2일 이란 혁명수비대가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에 대한 보복으로 봉쇄를 선언한 지 하루 만에, 이라크는 세계 2위 유전인 루마일라의 생산을 전면 중단했다. 바스라 석유공사가 3일 오후 3시부터 송유를 100% 멈추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현지 매체 샤팍뉴스 보도가 시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이라크 관리들은 로이터 통신에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유조선 이동이 불가능할 경우 며칠 내로 하루 석유 생산량을 300만 배럴 이상 줄여야 한다”고 밝혔다. 서부텍사스산(WTI) 원유 4월 인도분은 전장보다 9% 넘게 급등했고, 브렌트유는 배럴당 77.74달러로 6.7% 뛰었다.
세계 원유 20%가 통과하는 ’39km 병목’
호르무즈 해협은 이란 남부와 오만 사이 가장 좁은 지점이 39km에 불과하지만, 미국 외교협회(CFR) 시니어 펠로우 에드워드 피시먼은 이를 “지구상에서 단일 수로 기준 가장 전략적 가치가 높은 해상 요충지”라고 진단했다. 실제로 하루 1,430~1,490만 배럴, 전 세계 해상 물동량의 약 20%가 이 수로를 통과한다.
문제는 북미와 유럽이 40년 만에 최저 수준의 중동 에너지 수입 의존도를 기록한 반면, 아시아는 정반대 상황이라는 점이다. 2024년 기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 원유·응축유의 84%, LNG의 83%가 아시아 시장으로 향했다. 한국, 중국, 인도, 일본은 중동 원유 없이는 에너지 공급 체계 자체가 흔들리는 구조에 처해 있다.
안전자산 달러로 몰린 글로벌 자금
에너지 위기와 맞물려 안전자산 선호 심리가 확산되면서 주요 6개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반영하는 달러인덱스(DXY)는 장중 99.685까지 상승했다. 트레이드네이션의 선임 시장 애널리스트 데이비드 모리슨은 “미 달러가 여전히 대표적인 안전자산 통화임을 보여주는 신호”라고 평가했다.
슈왑 금융연구센터의 캐시 존스 수석 채권 전략가는 “세계 최대 산유국 중 하나이자 기축통화 발행국인 미국은 투자자 자금의 안전한 피난처로 인식될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실제로 오전 2시 49분께 달러-엔 환율은 157.748엔, 유로-달러 환율은 1.16007달러로 달러 강세가 전방위로 나타났다.
이날 야간 거래까지 총 현물환 거래량은 187억6,700만 달러로 집계됐다. 장중 고점 1,506.50원과 저점 1,459.10원의 변동 폭은 47.40원으로, 하루 동안 원화 가치가 3% 이상 흔들린 셈이다.
‘스태그플레이션’ 경고음…통화정책 딜레마
전문가들은 호르무즈 봉쇄가 장기화될 경우 물가 상승과 경기 침체가 동반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한다. Allianz Global Investors는 유가가 5~10% 상승하면 미국과 유럽의 헤드라인 인플레이션이 즉시 0.1~0.3%포인트 상승한다고 분석했다.
더 심각한 시나리오도 제기된다. 봉쇄가 30일 이상 지속되면 유가는 배럴당 120~150달러까지 치솟고, 장기화 시 200달러 이상, 최악의 경우 250달러 선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전망이다. 이 경우 극단적 시나리오에서 미국 인플레이션은 5% 이상으로 직접 밀려날 수 있으며, 연준이 금리 인상을 재개하도록 강요받을 수도 있다.
Ebury의 분석가들은 “글로벌 유가의 급격하고 지속적인 상승이 인플레이션 기대를 높여 세계 경제에 광범위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 달 이상 봉쇄가 지속되면 글로벌 경기 침체 확률은 75% 이상, 세계 GDP는 1.5~3% 위축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다만 이날 뉴욕증시가 낙폭을 줄이는 등 위험자산 회피 심리가 일부 완화되면서 달러-원 환율은 1,485원대로 내려와 마감했다. 세계은행은 이전에 미국 경제 전망을 ‘견조하다’고 평가했으나, 산유국 지역의 분쟁 격화에 따라 이러한 낙관적 평가가 시험대에 오르게 될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