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이 나면 금값이 오른다는 공식이 무너졌다. 이란 전쟁 발발 이후 국제 금·은 가격이 오히려 역대급 하락세를 기록하며 ‘안전자산’ 신화에 의문부호를 달고 있다.
국제 금 선물 가격은 2026년 3월 들어 30일(현지시간)까지 13% 이상 하락했다. 이는 글로벌 금융위기 국면이던 2008년 10월 이후 월간 기준 최대 하락률이다. 온스당 700달러에 달하는 낙폭은 역대 최악이며, 지난 1월 말 사상 최고치 대비로는 15% 하락했다.
은 선물 가격도 이달 들어 24% 하락하며 2011년 9월 이후 최대 낙폭을 기록했다. 역대 최대치인 온스당 22달러 하락이다.
유가 폭등이 쏘아 올린 ‘금리 인상’ 공포
시장에서는 이번 급락의 핵심 원인으로 기준금리 인하 전망 약화를 꼽는다. 이란 전쟁 이후 국제 유가가 폭등하면서 인플레이션 우려가 고조됐고, 중앙은행의 금리 인하 기대감이 빠르게 식었다.
금은 이자를 지급하지 않는 자산이다. 따라서 금리 인하 기대가 약해지거나 인상 가능성이 부각될수록 채권이나 달러화 대비 상대적 매력이 떨어진다. 일각에서는 금리 동결을 넘어 실제 인상 가능성까지 점치고 있어 매도 압력은 한층 거세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 같은 패턴은 역사에도 선례가 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에도 유가 급등이 실제 소비자물가 상승으로 이어지면서 국제 금값은 그해 4월부터 10월까지 7개월 연속 하락한 바 있다.
차익실현 물량까지 쏟아지며 낙폭 확대
2025년 한 해 동안 금값은 최대 65% 상승했고, 2026년 초에도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며 급등세를 이어왔다. 시장에서는 이처럼 2년간 큰 폭으로 오른 금·은을 보유하던 일부 투자자들이 주식 등 다른 자산의 손실을 메우거나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차익 실현에 나서고 있다고 분석한다.
중국에서도 파장이 감지됐다. 금값 급락에 중국 주요 6개 은행은 “귀금속 가격 변동성과 시장 불확실성에 주의하라”는 공식 경고를 잇달아 발표했다. 2025~2026년 초 금 투기를 주도했던 세력의 대량 매도가 낙폭을 더 키웠다는 진단이다.
파월·라가르드 “아직 판단 이르다”…중장기 전망은 엇갈려
다만 주요 중앙은행 수장들은 성급한 긴축 대응에 선을 그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지난 25일 “에너지 충격의 규모가 제한적이고 단기적이라고 판단되면 무시한다는 전통적 처방이 적용돼야 한다”고 밝혔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도 30일 “통화긴축 효과가 나타날 시점에는 유가 충격이 사라졌을 가능성이 크며, 공급 충격은 어떤 종류이든 그냥 지나치는 경향이 있다”며 즉각적인 기조 전환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시장에서는 단기적으로 달러 강세와 매도 압력이 지속되며 금값이 온스당 4,200달러 선까지 밀릴 수 있다고 분석한다. 반면 중장기적으로는 글로벌 공공부채 증가와 탈달러화 추세 등 구조적 지지 요인을 근거로 온스당 6,000달러 수준 회복을 전망하는 시각도 공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