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학계의 오랜 수수께끼가 풀렸다. 암 진단을 받은 사람이 알츠하이머 치매에 걸릴 확률이 낮고, 반대로 치매 환자는 암 발생률이 낮다는 역학 조사 결과가 수십 년간 보고되어 왔지만, 그 이유는 누구도 설명하지 못했다. 의료계는 단순히 “암 환자의 수명이 짧아 치매 발병 나이까지 살지 못한다”는 생존 편향 이론으로만 추정해왔다.
중국 화중과기대 루 유밍 교수 연구팀이 15년간의 장기 연구 끝에 그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밝혀내 국제 최상위급 학술지 ‘셀(Cell)’에 발표했다. 연구진은 암세포가 분비하는 특정 단백질이 혈액을 타고 뇌로 이동해 치매를 유발하는 독성 물질을 직접 제거한다는 사실을 동물 실험으로 증명했다. 단순한 통계적 우연이 아니라, 암세포의 생화학적 작용이 뇌 질환을 막는다는 획기적 발견이다.
이번 연구는 960만 명의 대규모 역학 데이터와 결합돼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 2020년 캘리포니아 주립대와 미시간대가 공동 분석한 결과, 암 진단 병력이 있는 집단은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알츠하이머 발생 확률이 평균 11% 낮았다.
암세포가 내보낸 단백질, 뇌 장벽 통과해 독성물질 제거
연구팀은 알츠하이머 증상을 보이도록 유전자 조작한 생쥐에 인간의 폐암, 전립선암, 대장암 세포를 이식했다. 정상적이라면 이 생쥐들은 나이가 들면서 뇌에 아밀로이드 베타라는 독성 단백질 덩어리가 쌓여 기억력과 인지 기능이 급격히 떨어진다. 그런데 암세포를 이식받은 생쥐들은 뇌에 플라크가 거의 형성되지 않았고, 일부 실험에서는 기억력까지 개선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핵심 비밀은 ‘시스타틴 C’라는 단백질이었다. 암세포가 혈액 속으로 대량 방출한 이 물질은 보통 통과하기 어려운 혈액뇌장벽을 넘어 뇌 조직 안으로 침투했다. 뇌에 도착한 시스타틴 C는 아밀로이드 베타 덩어리에 달라붙어 ‘제거 표적’으로 표시했다. 그러자 뇌 속 면역세포인 미세아교세포가 ‘TREM2’라는 감지 센서를 활성화하며 공격 모드로 전환돼 플라크를 적극적으로 청소하기 시작했다. 알츠하이머 환자의 뇌에서는 이 청소 기능이 약해져 독성물질이 계속 쌓이는데, 암세포의 단백질이 청소부 역할을 대신 수행한 셈이다.
960만 명 데이터가 입증한 ‘역설적 보호 효과’
동물 실험 결과는 대규모 인간 데이터로도 뒷받침된다. 캘리포니아 주립대와 미시간대가 분석한 960만 명의 의료 기록에서 암 진단자는 알츠하이머 발병률이 11% 낮게 나타났다. 영국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의 추적 관찰 연구에서도 폐암, 전립선암, 대장암, 유방암 등 주요 암종에서 공통적으로 치매 위험 감소가 확인됐다. 이는 특정 암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 암세포의 보편적 생물학적 특성임을 시사한다.
신경과 전문의들은 “한 장기에서 질병을 일으키는 세포가 분비한 물질이 다른 장기에서는 질병을 방어하는 도구로 작동한다는 역설적 발견”이라며 “암과 신경퇴행성 질환의 예상치 못한 생물학적 연결고리가 드러났다”고 평가했다. 다만 이는 암 자체가 유익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암세포의 특정 메커니즘을 안전하게 모방할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새로운 치매 치료제 개발 청사진 제시
연구진은 이번 발견을 바탕으로 새로운 형태의 알츠하이머 치료제 개발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한다. 루 유밍 교수팀은 “실제 암을 유도하지 않고 시스타틴 C의 청소 기능만 모방하는 치료제 설계를 목표로 한다”고 밝혔다. 암세포 단백질의 원리를 역으로 이용하면 기존 치료제와 전혀 다른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현재 승인된 알츠하이머 치료제들은 증상 완화에 그치거나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시스타틴 C 기반 치료는 뇌의 자체 면역 시스템을 활성화해 독성물질을 직접 제거하는 방식이어서 근본적 치료 가능성이 더 높다. 다만 임상 적용까지는 인간 대상 안전성 검증, 최적 용량 결정, 장기 효과 평가 등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암과 치매라는 두 가지 중증 질환 사이의 숨겨진 연결고리가 15년 만에 과학적으로 규명되면서, 노년층 건강을 위협하는 가장 무서운 질병 중 하나에 대한 새로운 치료 전략의 문이 열렸다. 생물학의 역설적 trade-off를 치료에 활용한다는 발상 자체가 향후 파킨슨병 등 다른 퇴행성 뇌질환 연구에도 중요한 플랫폼이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