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차가 러시아에서 공식 철수한 지 4년이 지난 현재, 조용하지만 치밀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2026년 5월 중순, 현대차는 러시아 특허청에 ‘엘란트라’와 ‘현대 마이티’ 두 가지 상표를 신규 등록했다. 등록 유효기간은 2034년 7월까지, 약 8년 3개월이다.
주목할 점은 이 상표 등록이 사업 재개 신호가 아니라는 점이다. 현대차는 불과 3개월 전인 2026년 2월, 2023년 12월에 러시아 업체에 매각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의 바이백(재매입) 옵션을 공식 포기했다. 공장은 돌아오지 않겠지만, 브랜드 이름은 지키겠다는 이원적 전략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상표 포기하면 브랜드도 잃는다
이번에 등록된 두 상표는 NICE 제12류에 해당하는 트럭, 승용차, 밴, 버스, 엔진 부품, 액세서리 등에 적용된다. 엘란트라는 현대차의 전통적인 세단 라인업을 대표하는 모델명이고, 현대 마이티는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중형 트럭 브랜드다.
상표권을 포기할 경우, 러시아 현지 업체나 경쟁사가 해당 이름을 선점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이름 분쟁을 넘어, 향후 러시아 시장 재진출 시 브랜드 복구에 막대한 비용을 초래할 수 있다. 위조품 단속의 법적 근거 또한 상표권 유지 여부에 달려 있다.
글로벌 브랜드도 같은 선택, 고립된 전략 아니다
이 같은 흐름은 현대차만의 특수 전략이 아니다. 타스 통신에 따르면 맥도날드, 코카콜라, 애플, 나이키, 도요타, 루이비통, 재규어, 넷플릭스, H&M 등 수십 개의 글로벌 브랜드가 러시아 시장 철수 이후에도 상표권을 유지하거나 갱신하고 있다. 한국 기업들도 예외가 아니다. 삼성전자는 2026년 3월 텔레비전·오디오 시스템 관련 상표 12건을, LG전자는 같은 해 5월 텔레비전 및 AI 관련 상표 11건을 각각 출원했다.
유리 주보프 러시아 특허청장은 지난 2025년 9월 타스 인터뷰에서 “저작권자들은 러시아 시장이 일시적으로 폐쇄되더라도 브랜드의 명성을 유지하는 데 관심이 있다”며 이를 위조 방지와 명의 도용 차단 목적으로 해석했다. 러시아 당국도 이러한 흐름을 ‘적대 행위’가 아닌 ‘브랜드 자산 보호’로 공식 인정하는 분위기다.
복귀 가능성은 열어두되, 명확한 재진출 시점은 미정
현대차의 현재 포지션은 ‘전략적 대기’다. 공장 바이백 포기를 선언하며 단기 재진출 의사를 공식 부인했지만, 동시에 “고객 관리를 강화하고 브랜드 이미지 훼손을 최소화하겠다”는 방침을 유지하고 있다. 상표 등록 유효기간이 2034년까지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전쟁 종전이나 국제 제재 완화 등 지정학적 환경 변화에 따라 시장 복귀 시나리오를 열어둔 포석으로 읽힌다.
다만 변수는 존재한다. 러시아 정부는 최근 디지털 시장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상표권이 등록됐더라도 실제 보호 강도는 정치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상표권 유지가 법적 권리를 보장하더라도, 그 권리의 실효성은 러시아의 정책 방향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낙관만 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결국 현대차의 이번 러시아 상표 등록은 ‘사업 재개’가 아닌 ‘브랜드 사수’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전쟁으로 인해 문이 닫힌 시장에서도 간판만은 내려놓지 않겠다는 것이다. 불확실한 지정학 시대에 브랜드 자산이 곧 미래 경쟁력임을 현대차는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