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중고차 시장이 완성차 업계의 핵심 격전지로 부상했다. 지난해(2025년) 중고차 거래량은 226만 7396대로, 신차 판매량 168만 8007대를 약 1.3배 이상 웃돌았다. 연간 거래 금액으로는 30~40조 원에 달하는 거대 시장이다.
과거 허위 매물과 정보 비대칭으로 ‘레몬마켓’이라 불리던 중고차 시장에, 이제 제조사들이 직접 품질 보증을 들고 뛰어들고 있다. 단순한 사업 확장이 아니다. ‘중고차 가격을 지배하는 자가 브랜드를 지배한다’는 전략적 판단이 그 배경에 있다.
현대차·기아, 품질 검증으로 신뢰 구축
현대차는 272개 항목(제네시스 287개)의 품질 점검을 통과한 무사고 차량만을 인증 중고차로 판매한다. 여기에 구독·렌탈 플랫폼 ‘현대 셀렉션’을 고도화해 신차 생산 → 렌탈 운영 → 인증 중고차 재판매로 이어지는 차량 전 생애주기 수직 계열화를 완성하겠다는 구상이다.
기아는 신차 출고 후 5년·10만㎞ 이내 차량을 매입해 약 200개 항목의 엄격한 검수를 거친다. 최근에는 인증 중고차 전용 프리미엄 서비스 ‘리멤버스’를 출시해 최대 1년·2만㎞ 보증 연장과 ‘기아 커넥트’ 1년 무상 이용 등 사후 관리 경쟁력을 대폭 강화했다.
KGM, 케이카 인수 추진으로 제조-유통 통합 승부수
KG모빌리티(KGM)는 한층 공격적인 행보를 보인다. KG그룹은 중고차 플랫폼 케이카의 지분 72% 인수를 5500억 원 규모로 추진 중이다. 케이카는 2025년 매출 약 2조 5000억 원, 전국 48개 직영점을 보유한 국내 최대 중고차 유통 기업이다.
이번 인수 추진은 KGM(제조)·케이카(유통)·KG ICT(플랫폼)를 하나로 연결하는 밸류체인 구축을 목표로 한다. 중고차 가격을 일정 수준으로 방어함으로써 신차의 잔존가치를 끌어올리고, 궁극적으로 브랜드 경쟁력 자체를 높이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수입차가 먼저 닦아 놓은 ‘인증’의 길
이 같은 전략은 수입 프리미엄 브랜드들이 이미 정착시킨 모델이다. 메르세데스-벤츠는 198개 항목 점검과 차량 이력 공개, 1년·2만㎞ 보증을 기반으로 인증 중고차 시장의 표준을 세웠다. BMW는 ‘프리미엄 셀렉션’으로 무사고 선별·360도 점검·금융 서비스를 결합했고, 아우디는 111개 항목 점검에 7일 교환 프로그램까지 운영한다.
럭셔리 브랜드는 더 엄격하다. 벤틀리는 본사 기준 79개 항목 검사를 통과한 차량만 판매하고, 페라리는 201개 항목의 정밀 점검과 순정 부품 기반 복원, 주행 테스트까지 마친 차량에만 인증을 부여한다. ‘중고차를 팔면서도 럭셔리 가치를 지킨다’는 철학이다.
다만 과제도 있다. 인증 중고차는 일반 매물보다 가격이 높은 경우가 많아 가격 민감도가 높은 국내 시장에서는 예상보다 더디게 정착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현대차 역시 2023년 8월 진출 초기, 높은 가격으로 인해 소비자 기대에 못 미쳤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기존 중고차 딜러 시장과의 마찰도 변수다.
그럼에도 업계의 방향성은 분명하다. 한 업계 관계자는 “앞으로는 신차를 얼마나 잘 파느냐보다 중고차 가격을 얼마나 잘 유지하느냐가 브랜드 경쟁력을 좌우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증 중고차 시장은 이제 단순한 재판매를 넘어, 신차-렌탈-중고차를 잇는 모빌리티 생태계 전쟁의 핵심 축으로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