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콜 이력이 있는 배터리를 탑재하고도 이를 철저히 숨긴 채 수천 대의 전기차를 팔았다면? 그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26년 3월 10일,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와 독일 본사(메르세데스벤츠 악티엔게젤샤프트)에 과징금 112억 3,900만원을 부과하고, 두 법인을 검찰에 고발했다.
이번 조치는 자동차 제조·판매업자가 전기차 배터리 셀 제조사 정보를 누락·은폐해 소비자를 기만한 행위를 제재한 국내 첫 사례다. 배터리 정보가 단순한 스펙 사항이 아니라 생명·안전과 밀접한 중요 정보라는 점을 공정위가 확인한 것이기도 하다.
CATL이라고 속이고, 파라시스를 넣었다
벤츠가 국내에 출시한 전기차 EQE와 EQS에는 중국 배터리 제조사 파라시스(Farasis)의 배터리 셀이 탑재돼 있었다. 파라시스는 EQE 국내 출시(2022년) 직전인 2021년 3월, 중국에서 배터리 화재 위험으로 대규모 리콜된 이력을 가진 업체다.
벤츠코리아와 독일 본사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2023년 6월 제작·배포한 판매 지침에 파라시스 탑재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벤츠가 CATL을 선택한 이유”, “업계 최고의 기술력”, “전 세계 시장점유율 1위” 등의 표현을 동원해 CATL 배터리의 우수성을 강조하도록 딜러사에 안내했다.
결과적으로 딜러사들은 파라시스 탑재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소비자에게 CATL 셀이 사용됐다고 설명했고, 소비자는 이를 믿고 차량을 구매했다. CATL은 2024년 기준 세계 배터리 셀 점유율 1위 사업자인 반면, 파라시스는 점유율 1~2% 수준으로 순위권 밖이다. 벤츠코리아가 판매 지침 작성 과정에서 딜러사를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응답자 약 3분의 1이 배터리 셀 제조사 정보를 구매 시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았다.
청라 화재가 모든 것을 드러냈다
이 기만 행위는 2024년 8월 1일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파라시스 셀이 탑재된 벤츠 전기차에 화재가 발생하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당시 화재로 차량 40여 대가 소실되고 100여 대가 열 손상 피해를 입었다.
사회적 논란이 커지자 벤츠는 화재 발생 12일 후인 2024년 8월 13일에야 차종별 배터리 셀 제조사를 공개했다. 은폐 기간 동안 파라시스 셀을 탑재한 벤츠 차량은 약 3,000대, 판매 금액으로는 약 2,810억원에 달했다. 배터리 정보 공개 이후에는 파라시스 셀 탑재 모델의 판매량이 CATL 탑재 모델 대비 현저히 줄어든 것으로 공정위는 파악했다.
공정위는 벤츠코리아가 판매 지침의 주요 내용을 독일 본사에 사전 보고했으며, 독일 본사가 해당 지침을 우수 사례로 선정해 다른 나라에까지 소개·전파한 정황도 확인했다. 기만 행위에 본사가 직·간접적으로 가담했다는 판단이다.
112억 과징금, 그리고 손배소 도화선
이번 과징금 112억 3,900만원은 위계에 의한 고객유인 행위 제재 중 규모로는 역대 3번째지만, 부과 기준율(관련 매출액의 최대 4%)은 최고 수준으로 적용됐다. 공정위가 배터리 정보를 생명·안전과 직결된 중대 사안으로 판단한 결과다.
황원철 공정위 상임위원은 “딜러사를 통해 소비자를 속인 경우에도 부당한 고객유인 행위의 주체는 제조·판매업자”라는 점을 이번 결정으로 명확히 했다고 밝혔다. 소비자를 직접 상대하지 않더라도, 기만적 판매 구조를 설계한 본사와 총판이 법적 책임을 진다는 원칙이 확립된 것이다.
공정위에는 현재 90건 이상의 소비자 민원이 접수된 상태다. 이번 공정위 결정은 벤츠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의 핵심 근거로 활용될 전망이며, 집단소송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검찰 수사 결과에 따라 법적 파장은 더욱 확대될 수 있다. 전기차 시대, 배터리 정보는 더 이상 제조사의 영업 비밀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