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진 가격에 맞춘 설계
초저가 전쟁에 유통 전략도 변화
가격 민감한 소비자 움직임 노린다

유통업계는 지금 ‘가격역설계’라는 새로운 전략으로 소비자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서울 시내 한 대형마트 주류 코너를 방문한 손님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하이볼 한 병의 가격표에는 ‘5,980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어려웠던 가격대다.
‘역설계’가 만든 5천원대 위스키

전통적으로 상품 가격은 원가와 이윤을 더해 결정됐다. 그러나 최근 유통업계는 정반대 접근을 택했다.
소비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가격’을 먼저 정하고, 여기에 맞춰 제품 원가와 마진을 역산해 조정하는 방식이 확산 중이다. 이른바 ‘가격역설계’다.
대표 사례는 이마트의 ‘저스트 포 하이볼’이다. 5980원이란 가격은 음식점 소주 한 병 수준이다. 유리병 대신 페트병을 사용하고, 하이볼이라는 목적성에 맞춰 위스키 원액을 조정했다. 마트 측은 박리다매로 이익을 확보한다는 전략이다.
화장품도 예외가 아니다. 이마트는 LG생활건강과 손잡고 ‘글로우:업’ 스킨케어 8종을 4,950원에 선보였다. 덕분에 출시 두 달 만에 매출이 2배 가까이 뛰었다.

편의점 업계도 초저가 행보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CU는 480원짜리 ‘득템 라면’, 1,900원짜리 닭가슴살 등으로 고객을 사로잡았다.
특히 득템 라면은 일반 라면 대비 절반 가격이지만, 매출 신장률은 37.5%를 기록했다. 닭가슴살은 전년 대비 77.6% 매출 증가를 보이며, PB 상품 시장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지고 있다.
출혈 경쟁의 그림자… 장기적으로는 수익성 악화 우려도
문제는 이같은 초저가 전략이 마냥 긍정적이지만은 않다는 점이다. 유통사들은 판매량 확대를 위해 이윤을 최대한 줄인다. 때로는 손해를 감수하는 ‘역마진’도 감행한다.
단기적으로는 매출 증가를 기대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업계 전반의 수익성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

실제 대형마트들은 삼겹살 가격을 두고 100g당 1~2원 단위까지 출혈 경쟁을 벌인다. 유통사 간 가격 전쟁은 제조사나 납품업체까지 영향을 미치며 생태계를 흔들 수 있다.
반면 유통사들은 PB 상품 강화, 대량 매입, 반제조 상품 활용 등 다양한 방식으로 원가 절감을 시도하고 있다. 불황형 소비가 장기화되면서 이같은 전략은 당분간 더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초저가 상품은 이제 단순한 가격 파괴를 넘어, 유통업계 전반의 전략을 뒤흔드는 변화의 중심에 섰다.
소비자들은 싸고 실용적인 것을 원하고, 유통사는 그 니즈를 읽고 빠르게 대응한다. 하지만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직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