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가 줄었는데 재고가 오히려 더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지난달 전 세계 원유 재고가 단 한 달 만에 약 2억 배럴 감소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코로나19 팬데믹 시기를 제외하면 사상 최대 규모의 감소폭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5일(현지시간) S&P 글로벌 에너지의 자료를 인용해 4월 글로벌 원유 재고가 하루 평균 660만 배럴씩 줄어들었다고 보도했다. 같은 기간 유가 급등의 영향으로 수요도 하루 500만 배럴가량 감소했지만, 공급 축소 속도가 이를 크게 웃돌았다.
골드만삭스는 현재 글로벌 원유 재고가 최근 8년 내 최저 수준에 근접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휘발유·경유·항공유 등 정제유 재고는 약 45일치만 남은 상태로, 특히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에서 감소 폭이 두드러지는 것으로 파악됐다.
공급 감소가 수요 감소를 압도하는 ‘역전 현상’
통상적으로 월간 글로벌 원유 재고 변동폭은 수십만~100만 배럴 수준에 그친다. S&P 글로벌 에너지의 짐 버크하드 원유 리서치 책임자는 “4월 감소분은 엄청나며 통상적인 범위를 크게 벗어난다”고 밝혔다.
그는 수요가 빠르게 줄고 있음에도 “공급 감소 속도가 이를 압도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번 자료에는 정부·기업 보유 재고와 함께 해상 유조선에 실린 물량, 미국의 전략비축유 방출분까지 모두 포함된 수치다.
버크하드 책임자는 전 세계 원유 재고가 약 40억 배럴에 달하지만, 이 중 상당 부분은 정유시설 운영이나 송유관 압력 유지 등 일상적 운영에 묶여 있어 실제로 즉시 활용 가능한 물량은 제한적이라고 설명했다.
‘공급 충격’의 구조…1973년 오일쇼크와의 유사성
에너지 시장 전문가들은 이번 상황을 2020년 코로나19 당시의 ‘수요 충격’과는 성격이 다른 ‘공급 충격’으로 분류한다. 코로나19 때는 수요 붕괴로 재고가 급증했지만, 현재는 중동 지정학적 긴장에 따른 공급 차질이 시장을 압박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란 전쟁 장기화 이후 시장에서 사라진 원유는 누적 기준으로 약 10억 배럴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북유럽의 항공유 재고는 4월 기준 6년 만의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업계 관계자들은 이 같은 공급 구조가 1973년 아랍 석유 금수 당시와 유사한 메커니즘을 보인다고 전했다. 당시에도 공급 차질이 수요 조절 속도를 앞질러 가격 급등을 촉발한 바 있다.
여름 성수기 앞두고 수급 위기 심화 우려
에너지 업계에서는 5월 이후 본격화되는 여름 성수기가 수급 불균형을 더욱 가속화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휴가철 항공 수요와 냉방용 전력 수요가 맞물리면서 이미 45일치 수준으로 줄어든 정제유 재고를 더욱 압박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FT는 여름 휴가철을 앞두고 국제유가가 추가 급등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보도했다. 골드만삭스 역시 현재의 재고 수준을 8년 내 최저치에 근접한 위험 구간으로 평가하고 있다.
에너지 전문가들은 공급 회복의 핵심 변수로 이란 분쟁의 향방과 사우디아라비아·UAE 등 주요 산유국의 증산 여부를 꼽는다. 미국의 전략비축유 방출 정책도 지속 가능성의 한계에 직면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장 불안이 쉽사리 해소되기는 어렵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