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 인프라 투자가 가속화되면서 메모리반도체 시장의 주인공이 바뀌고 있다. 그동안 AI 반도체 성능 경쟁의 핵심으로 주목받던 고대역폭메모리(HBM)를 포함한 D램 중심의 성장 패턴이, 데이터 저장과 관리 영역으로 빠르게 확산되면서 낸드플래시가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투자은행(IB) JP모건은 2024년부터 2027년까지 AI 관련 낸드 전체시장규모가 연평균 110%에 육박하는 성장세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같은 기간 AI D램 성장률 91%를 상회하는 수치다.
2026년 2월 9일 현재 반도체 업계는 메모리 시장이 단기 호황인 ‘슈퍼사이클’을 넘어 장기 성장의 시작인 ‘메가사이클’에 진입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실제로 2026년 전체 메모리 시장은 약 8,000억 달러 규모로 전년 대비 53% 성장하며 처음으로 1천조원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의 반도체 수출은 2026년 1월 기준 205억4,000만 달러를 기록하며 전년 동월(101억3,000만 달러) 대비 2배 이상 증가했고,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31.2%로 처음 30%를 넘어섰다.
추론 시대가 바꾼 메모리 수요 구조
시장 전문가들은 낸드 수요 급증의 배경으로 AI 활용방식의 근본적 변화를 지목한다. 초기 AI 투자가 대규모 학습용 서버 중심이었다면, 최근에는 실제 서비스 단계의 추론 중심 활용이 빠르게 늘고 있다. 학습 단계에서는 고대역폭과 저지연이 중요한 D램의 비중이 컸지만, 서비스 단계에서는 데이터를 얼마나 많이, 안정적으로 저장·관리할 수 있는지가 성능과 비용효율을 좌우한다는 분석이다.
KAIST 김정호 교수는 AI가 멀티모달로 진화하면서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현재보다 1,000배 이상 필요해질 것으로 전망했다. 모건스탠리는 하이퍼스케일러를 중심으로 엔터프라이즈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eSSD) 선주문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으며, AI 서버를 늘리면서 연산장비보다 데이터 저장공간을 먼저 확보하려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시장조사 업체 트렌드포스 역시 AI 서버와 데이터센터 수요 확대, 공급사들의 보수적인 증설 기조가 맞물리며 낸드 수급이 빠르게 타이트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공급 부족이 만든 판매자 천국
메모리 시장은 현재 완전한 판매자 우위 구조로 전환됐다. AI 시대 데이터센터에서 당장 반도체가 필요한데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 조성되면서, 구매자들이 “가격에 상관없이 물건을 주기만 해달라”고 요청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업계는 전했다. 범용 D램 공급 부족으로 인해 PC·스마트폰 제조사들이 2026년 출하량 목표를 최대 20% 하향 조정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공급 제약에는 구조적 원인이 있다. 메모리 업체들이 그동안 AI D램과 HBM에 투자를 집중하면서 낸드 증설에는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태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중국 업체들의 증설이 미국 규제로 제약을 받으면서 글로벌 낸드 공급여력이 빠르게 늘지 못하는 상황이다. 모건스탠리는 “메모리반도체 물량은 이미 내년까지 완판됐고, 2026년 1분기 D램 계약 가격은 70~100% 급등할 것”이라며 “2027년까지 메모리반도체 가격이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전망했다.
실제로 모건스탠리는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이 2026년 246조원, 2027년 317조원을 기록하고, SK하이닉스는 2026년 178조원, 2027년 225조원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는 국내 증권사들의 평균 전망치보다 훨씬 높은 수치다. 같은 기관은 삼성전자 목표주가를 17만원에서 21만원으로, SK하이닉스는 84만원에서 110만원으로 각각 상향 조정했다.
다중 승자 시장의 새로운 경쟁 룰
업계 전문가들은 낸드 시장의 확산 방식이 D램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분석한다. D램, 특히 HBM은 엔비디아라는 최대고객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구조다. 소수 핵심 고객의 투자계획이 곧 시장 흐름을 좌우한다. 반면 낸드는 AI 서버를 비롯해 기업용 스토리지, 엣지 AI, 자동차, 온디바이스 AI 등 사용처가 빠르게 분산되고 있어 특정 고객이나 제품에 대한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낮다.
이는 경쟁 구도에도 영향을 미친다. ‘기술 선점’ 여부가 수익성을 결정짓는 D램과 달리, 낸드는 제품 구성과 공급안정성, 고객맞춤형 대응 능력이 경쟁력을 좌우한다고 시장에서는 분석한다. 각 업체가 강점을 가진 영역에서 점유율을 확대하면 충분히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라는 평가다. 승자독식이 아니라 여러 승자가 공존할 수 있는 시장이라는 점에서 성장경로도 다르다.
다만 일부 전문가들은 신중론도 제기한다. 신영증권 김학균 리서치센터장은 “반도체 산업의 특징은 이익의 진폭이 매우 크다는 점인데, 기업들은 경기가 좋을 때 미래를 낙관하며 대규모 설비투자를 단행하지만 이는 공급과잉으로 이어져 제품 단가를 떨어뜨리는 자기파괴적 결과를 낳는다”면서 “과거에도 그랬듯 업황에 대한 낙관론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주가는 반대로 하락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시장 조사 기관들은 2026년을 AI 메모리 호황이 실제 산업 성장으로 이어질지에 대한 ‘검증의 해’로 규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