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젊은이들, 드라마로 접한
낯선 문화에 푹 빠져
K-콘텐츠가 만든 신(新) 트렌드

“드라마 ‘궁’을 보고 이 술을 알게 됐고, ‘검법남녀’를 보면서 맥주와 섞어 마시는 법을 배웠어요.”
필리핀 마닐라에서 만난 사이린(23)의 말이다.
그는 쇼핑카트에 담긴 ‘참이슬 프레시’와 ‘산미구엘’ 맥주를 들어 보이며 웃었다.
한국의 대표 증류주인 소주가 이제는 필리핀 젊은이들 사이에서 트렌디한 음료로 자리잡고 있다.
마닐라 대형 회원제 마트 S&R의 주류 코너에서는 와인과 맥주 사이에 초록빛 병들이 눈에 띄게 진열돼 있었다.

한때 한국 음식점에서나 볼 수 있었던 이 주류가 이제는 필리핀 대형마트의 일상적인 제품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K-드라마에서 시작된 문화 열풍
필리핀 소비자들이 한국 주류를 알게 된 경로는 대부분 드라마다.
나이자(25)는 “드라마 ‘힘쎈여자 도봉순’에서 삼겹살과 함께 마시는 장면을 보고 알게 됐다”며 “주로 불닭볶음면이나 스팸과 함께 즐긴다”고 전했다.
킴(30)도 같은 드라마를 통해 가족과 함께 한국식 음주를 시작했다고 한다.

“한국 술은 시식(필리핀식 돼지고기볶음) 등 필리핀 음식과도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현지 소비자들은 알코올 도수 30~40도인 필리핀 전통 술과 달리 도수가 낮아 깔끔한 맛을 높이 평가했다.
또한 가격이 100ml당 약 700원으로, 필리핀의 대중적 위스키인 ‘푼다도르’보다 저렴한 점도 매력으로 작용한다.
하이트진로, 필리핀을 글로벌 전략의 핵심으로
이러한 호응에 힘입어 하이트진로는 지난해 필리핀에서 동남아 국가 중 1위 판매량을 기록했다.

2019년 판매 법인 설립 이후 2022~2024년 판매액이 연평균 41.7% 성장하는 성과를 거뒀다.
김인규 하이트진로 대표는 최근 마닐라 기자간담회에서 “우리의 경쟁자는 같은 주류 업체가 아니다. 넷플릭스 보는 사람, 여행 가는 사람 모두 우리가 끌어와야 할 고객”이라며 소비자 라이프스타일 전체를 겨냥하는 전략을 밝혔다.
국내 인구 감소와 음주 기피 문화 확산에 대응해, 동남아 시장은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올해 2월 베트남 타이빈성에 첫 해외 생산 공장을 착공했으며, 2026년 완공되면 연간 최대 500만 상자를 현지에서 직접 생산할 계획이다.
인기에 편승한 모방 제품 확산과 대응

동남아 지역에서의 인기로 한류 열풍에 편승한 모방 제품도 급증하고 있다.
황정호 하이트진로 해외사업본부 전무는 “베트남만 해도 유사 제품이 27개 브랜드, 170가지 종류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모방품들은 한국 제품과 동일한 녹색 병에 한글 라벨을 부착해 구분이 어려우며, 정품보다 30% 이상 저렴한 가격에 판매되고 있다.
품질 문제로 한국 제품 이미지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이에 업계는 현지 모방품과의 가격 경쟁력 확보를 위해 동남아 지역 내 생산기지 구축에 적극 나서고 있다.

하이트진로는 내년 11월 시운전을 목표로 베트남 생산기지 건설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회사 측은 “현지 생산을 통해 수입 관세 부담을 줄이고, 가격 경쟁력을 확보해 모방품과의 격차를 좁히겠다”는 계획이다.
한국 주류의 동남아 열풍은 단순한 수출 증가를 넘어 문화적 교류의 새로운 장을 열고 있다.
K-드라마에서 시작된 이 현상은 이제 하나의 라이프스타일로 자리 잡아 가며, 한국 주류 산업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