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 모스크바 번화가 한복판. 현대모터스튜디오에는 2020년식 구형 아이오닉 1대만 덩그러니 전시돼 있지만, 러시아 젊은이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자동차를 보러 온 것이 아니다. 이들은 노트북을 펼쳐놓고 일하거나 공부한다. 커피 한 잔 주문 없이도 누구나 쓸 수 있는 공유 오피스로 변신한 것이다.
현대차는 2026년 2월 초 러시아 공장 재매입 옵션을 포기했다고 밝혔다. 2023년 12월 공장을 매각할 때 2년 내 되살 수 있는 바이백 옵션이 붙어 있었지만 행사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완전 철수를 선언한 셈이다. 그런데도 모스크바 전시관은 여전히 문을 열고 있다. 직원은 “최소 5년간은 열려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23일 러시아 내 한국 업계에 따르면, 현대차처럼 주요 한국 기업들은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시장을 떠났지만 ‘최소한의 명맥’은 유지하고 있다. 한 기업 관계자는 “대체로 상황이 좋아지면 신속히 재진입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전시관 아닌 ‘문화 거점’으로 버티기
한국 기업들의 전략은 명확하다. 각종 대러 제재로 직접 사업은 어렵지만, 브랜드 가치만큼은 지키겠다는 것이다. 방법은 문화예술 후원이다. 삼성전자는 2003년부터 러시아 레프 톨스토이 박물관과 공동 제정한 톨스토이 문학상을 계속 후원하고 있다. 2024년에는 한국계 미국 작가 김주혜가 장편소설로 이 상을 받았다. 올해 2월 5일에는 제24회 톨스토이 문학상 작품 접수를 시작했다.
롯데는 1월 26일 푸시킨 신인 문학상의 수상 후보작 접수를 시작했다. 올해 10주년을 맞은 이 상은 러시아의 위대한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을 기리며 재능 있는 작가를 발굴한다. LG전자는 모스크바 푸시킨미술관과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에 전시·공연 정보를 알리는 디스플레이를 설치해 로고를 노출하고 있다.
제3국 우회와 상표권 선점
사업은 직접 하지 못해도 준비는 계속된다. 한국 기업들은 카자흐스탄, 중국 등 제3국을 통해 러시아에 상품을 공급하고 있다. 국내와 미국, 유럽의 브랜드 평판 때문에 러시아에서 적극적으로 사업하는 모습을 드러내기는 경계하지만, 우회로는 유지하는 것이다.
최근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차, 기아 등이 러시아연방지식재산서비스(로스파텐트)에 상표권 등록을 신청했다는 보도도 잇따랐다. 업계에서는 상표 권리를 보호하고 시장 복귀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으로 분석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문을 쾅 닫고 나간 기업들은 쉽게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고 있지만, 한국 기업들은 문을 세게 닫지 않고 ‘문틈으로 한 줄기 빛이 들어오게’ 만든 상태다.
K-콘텐츠는 제재 뚫고 성장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에서 K-푸드, K-뷰티 열풍은 계속되고 있다. 러시아 마트에는 컵라면 도시락, 초코파이 외에도 다양한 한국 과자와 라면, 아이스크림, 술, 화장품, 샴푸가 매대를 채우고 있다. 지난 2월 9~12일 모스크바 국제식품박람회에는 농림축산식품부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가 통합한국관을 구성해 신선과일, 인삼제품, 냉동 김밥 등을 알리고 수출 상담을 진행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러시아가 재진입하려는 글로벌 기업에 대규모 현지 투자를 요구하는 등 높은 진입 장벽을 세울 것으로 전망한다. 그럼에도 한국 기업들이 러시아에 ‘작은 씨앗’을 계속 뿌리는 이유는 명확하다. 우크라이나 평화 협상 타결은 당장 기대하기 어렵지만, 문제가 해결되고 정세가 안정될 경우 신속히 복귀하기 위해서다. 완전 철수가 아닌 ‘전략적 대기’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