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국인 투자자가 올해 들어 유가증권시장에서 84조 9,270억 원을 순매도하는 동안, 정반대 방향의 자금 흐름이 조용히 포착됐다. 바로 일반 지주사 종목군에 대한 ‘선별적 집중 매수’다.
연합인포맥스에 따르면 외국인은 연초부터 5월 15일까지 SK·HD현대·두산·한화·LG·CJ·효성 등 7개 주요 지주사를 합산 약 1조 8,637억 원어치 순매수했다. 전체 시장에서 대규모로 자금을 빼내면서도, 특정 섹터에는 거꾸로 베팅을 늘린 셈이다.
반도체는 팔고, 지주사는 산다
외국인의 매도 집중 대상은 반도체 대형주였다. 같은 기간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에서만 각각 8조 1,073억 원, 7조 904억 원을 순매도했다. 코스피가 사상 최고 수준까지 급등한 상황에서 차익 실현에 나선 것이다.
이 물량은 개인 투자자가 대부분 받아냈다. 신용융자잔고가 약 36조 원에 달하는 가운데, 지난달 유가증권시장에서 개인의 1억 원 이상 주문 건수는 119만 3,158건으로 월 기준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증권가에서는 이를 두고 외국인이 파는 물량을 레버리지를 동원한 개인이 받아내는 ‘빚투 장세’로 진단한다.
지분율로 확인되는 ‘구조적 베팅’
외국인의 지주사 매수는 지분율 변화로도 확인된다. 한화의 외국인 지분율은 지난해 말 16.99%에서 5월 15일 21.91%로 약 5%포인트 뛰었고, 두산도 14.98%에서 18.89%로 올랐다. SK는 26.95%에서 29.78%로, LG는 35.07%에서 36.11%로 각각 상승하는 등 조사 대상 7개 지주사 모두에서 외국인 지분율이 높아졌다.
이경연 대신증권 연구원은 “단순한 업종 로테이션이 아니라 각 지주사가 보유한 사업 포트폴리오와 그 산업의 구조적 성장이 외국인을 끌어들이는 실질적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HD현대의 경우 조선·전력기기·건설기계·선박 서비스 등 주요 자회사가 성장 사이클에 진입하면서 배당과 브랜드 로열티가 지주사로 귀속돼 매력도가 높아졌다는 설명이다.
SK에 대해서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이 나온다. SK실트론 지분 매각으로 대규모 현금 유입과 차입금 축소 효과가 기대되는 데다, SK에코플랜트의 재무적 투자자 지분을 인수하면서 AI 인프라 기업으로서의 가치가 지주사에 반영될 것으로 시장은 전망한다.
입법 속도가 ‘리레이팅’의 변수
정책 모멘텀도 외국인 매수의 배경으로 지목된다. 박건영 KB증권 연구원은 “과거 지주사는 총수 일가와 일반 주주 간 이해 상충 구조 및 불투명한 기업 지배 구조로 순자산가치(NAV) 디스카운트가 고착됐다”고 진단했다. 지배주주가 저평가된 자회사 주가를 활용해 일반 주주에게 불리한 합병을 강행하거나 중복 상장이 어려워질 경우, 자회사 가치가 지주사 가치에 보다 온전히 반영될 수 있다는 기대다.
현재 정치권에서는 상속세 부담 경감을 목적으로 지배주주가 의도적으로 주가를 저평가하는 행위를 규제하는 이른바 ‘주가 누르기 방지법’도 논의 중이다. 박 연구원은 “지주사 주가 리레이팅은 여전히 진행 중”이라며 “남은 정책들의 입법 속도에 따라 추가적인 NAV 디스카운트 해소 여력이 충분히 존재한다”고 밝혔다. 다만 개정안이 아직 국회 통과 전이라는 점에서, 입법 지연 시 선반영된 기대가 되돌림을 맞을 수 있다는 경계의 시각도 공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