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환위기의 충격이 한국을 덮쳤던 1998년 이후 단 한 번도 넘어서지 못했던 벽이 무너졌다. 반도체 가격 급등과 원/달러 환율 상승이 맞물리면서, 지난 4월 한국 수출 물가가 28년 만에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한국은행이 15일 발표한 수출입물가지수 통계에 따르면, 4월 수출물가지수(원화 기준)는 187.40을 기록했다. 이는 3월(174.92) 대비 7.1% 오른 수치로, 10개월 연속 상승세를 이어간 것이다. 전년 동월 대비 상승률은 40.8%로 치솟아,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3월(57.1%) 이후 28년 1개월 만에 가장 큰 폭을 기록했다.
이번 수치는 단순한 통계적 이정표에 그치지 않는다. 수출 가격이 수입 가격보다 훨씬 빠르게 오르면서 교역조건이 뚜렷하게 개선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경제의 수출 수익성 변화를 가늠하는 핵심 지표로 주목받고 있다.
반도체가 끌어올린 수출 가격…기억장치 71% 폭등
수출물가 급등의 핵심 동력은 반도체였다. 컴퓨터·전자 및 광학기기 부문이 전월 대비 16.9% 오르며 상승을 주도했고, 화학제품도 7.7% 상승했다.
세부 품목을 들여다보면 상승 폭이 더욱 뚜렷하다. 컴퓨터 기억장치는 71.4%, D램은 25.0% 급등했다. 이 결과 컴퓨터·전자 및 광학기기의 수출물가지수는 198.30에 달했으며, 이는 2010년 8월(201.77) 이후 15년 8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이문희 한국은행 물가통계팀장은 “원/달러 환율이 상승한 가운데 컴퓨터·전자 및 광학기기 등이 오르면서 수출물가가 상승했다”고 설명했다. 화학 부문에서는 프로필렌이 23.6% 상승하며 반도체와 함께 가격 상승을 이끌었다.
유가 급락에 수입물가는 하락…교역조건은 개선
수출물가가 치솟는 동안 수입물가는 오히려 내렸다. 4월 수입물가지수(원화 기준)는 168.12로, 3월(172.16)보다 2.3% 하락하며 10개월 만에 하락 전환했다.
수입물가 하락의 주된 배경은 국제 유가 급락이다. 두바이유 월평균 가격은 중동 전쟁 발발 직후인 3월 배럴당 128.52달러에서 4월 105.70달러로 17.8% 내렸다. 이에 따라 원재료 중 원유 등 광산품이 10.5% 하락하며 수입물가 전반을 끌어내렸다.
수출 가격이 오르고 수입 가격이 내리면서 교역조건도 뚜렷하게 개선됐다. 순상품교역조건지수는 107.02로 1년 전보다 14.3% 상승했으며, 소득교역조건지수는 147.59로 28.5% 높아졌다. 같은 기간 수출 가격(33.6%)이 수입 가격(16.9%)을 두 배 가까이 웃돌았기 때문이다.
반도체 강세 지속될까…5월 수입물가도 ‘안갯속’
시장에서는 반도체 가격의 향방이 향후 수출물가 흐름을 좌우할 핵심 변수로 분석한다. 이 팀장은 “중장기적으로 반도체 가격 강세가 이어지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월별 전월 대비 변동 추이에는 불확실성이 있어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5월 수입물가 전망도 불투명하다. 유가와 환율은 수입물가를 낮추는 하방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두 달 넘게 이어지는 중동 전쟁으로 원자재 공급 불안이 지속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팀장은 “5월 수입물가 향방을 예단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선을 그었다.
한국은행 관계자들은 반도체 현물 가격 추이와 중동 정세, 원/달러 환율 변동이 향후 수출입물가를 가르는 세 가지 핵심 축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1998년 외환위기 당시의 수출물가 폭등이 원화 붕괴에 따른 착시였다면, 2026년의 급등은 반도체라는 실물 경쟁력이 견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성격이 다르다는 평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