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밥상을 좌우하는 밀가루 가격이 6년간 ‘짬짜미’로 통제돼 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일 사조동아원·대한제분·CJ제일제당 등 국내 주요 제분사 7곳이 밀가루 공급 가격과 물량을 담합한 혐의로 총 6,710억 4,500만 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기로 전원회의에서 의결했다고 밝혔다.
이번 과징금은 국내 담합 사건 사상 역대 최대 규모다. 담합 관련 매출액은 총 5조 6,900억 원에 달하며, 6년간 담합 규모는 약 6조 원으로 추산된다.
55차례 밀약…B2B 시장 88% 틀어쥔 ‘카르텔’
담합은 2019년 11월 대한제분·CJ제일제당·사조동아원 등 상위 3개사 대표급 임원과 삼양사 임직원이 식당에서 회합하면서 시작됐다. 이들은 농심을 포함한 전체 B2B 거래처를 상대로 ‘과도한 가격 경쟁을 자제하고 적정 가격을 유지하자’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후 담합은 순차적으로 확대됐다. 2020년 1월 삼화제분·대선제분·한탑 등 하위사가 가담했고, 2021년 4월부터는 7개사 전원이 전체 거래처의 밀가루 전 제품 가격을 공동으로 결정했다. 공정위에 따르면 이들은 총 55차례 회합을 갖고 24차례에 걸쳐 가격·물량 담합을 실행했다.
7개 제분사의 B2B 밀가루 시장 점유율은 87.7%(2024년 매출액 기준)에 달한다. 나머지 사업자인 에스피씨삼립과 삼양제분은 주로 계열사에만 공급해, 사실상 7개사가 일반 B2B 시장 가격을 좌우하는 구조였다는 게 공정위의 판단이다.
원맥 내려도 값 올리고, 보조금 받으면서도 담합
담합의 반시장적 행태는 원가 하락기에 더욱 두드러졌다. 2023년 이후 수입 원맥 시세가 하락 국면으로 전환됐음에도, 제분사들은 원가 하락분을 대형 수요처에 최대한 늦게 반영하기로 합의하고 이를 실행했다. 농심이 2024년 12월 원맥 시세 안정을 이유로 가격 인하를 요청하자, 상위 4개사는 오히려 환율 상승을 명분으로 밀가루 공급가를 kg당 15~20원 인상했다.
정부 보조금이 투입된 기간에도 담합은 계속됐다. 국제 원맥 시세가 급등하던 2022년 6월부터 2023년 2월까지, 정부는 물가 안정 명목으로 제분사들에 총 471억 원의 가격 안정 지원사업 보조금을 지급했다. 그러나 제분사들은 이 기간에도 가격·물량 담합을 멈추지 않았다.
공정위는 보조금 환수 여부에 대해 “사후 조치는 담당 부처인 농림축산식품부가 판단할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일각에서는 부처 간 역할 분리로 인해 책임 공백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소비자 전가·재범·형사 고발…삼중 충격
담합의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전가됐다. 담합 기간 중인 2022년 9월 기준 밀가루 판매 가격은 담합 시작 시점인 2019년 12월 대비 제분사별로 38~74% 급등했다. 농심·오뚜기·팔도 등 제빵·제면 업체들이 인상된 원가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소비자 가격을 올렸고, 시장에서는 빵·라면 등의 가격 상승 원인 일부가 이번 담합에 있다고 분석한다.
이들 제분사는 2006년에도 밀가루 담합으로 공정위 제재를 받은 전력이 있다. 동일 업종에서 약 20년 사이 두 차례 카르텔이 적발된 ‘재범’이라는 점에서 공정위는 법 위반 정도가 중대하다고 판단했다. 공정위는 이미 지난 1월 7개 제분사와 담합 가담 임직원 14명을 검찰에 고발했다.
공정위는 이번 제재와 함께 각 제분사가 3개월 이내에 가격을 독자적으로 재결정하도록 명령하고, 향후 3년간 가격 변경 현황을 연 2회 서면보고하도록 했다. 남동일 공정위 부위원장은 “국민 생활과 밀접한 식료품의 가격을 놓고 법 위반이 확인되면 엄중히 제재해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공정위는 설탕에 이어 밀가루, 그리고 전분당 담합 의혹까지 기초 식품 원재료에 대한 감시를 이어나갈 방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