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 서버 투자 경쟁이 메모리 반도체를 넘어 핵심 부품 시장까지 뒤흔들고 있다. 글로벌 빅테크의 공격적인 인프라 투자로 반도체 가격이 치솟은 데 이어, 이제는 전자제품의 ‘숨은 주역’으로 불리는 적층세라믹커패시터(MLCC) 가격까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특히 업계 1위 무라타제작소가 공식적으로 가격 인상을 검토하면서, MLCC 시장 전반에 걸친 가격 재조정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23일 업계에 따르면 무라타의 나카지마 노리오 사장은 지난 17일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AI의 실질적 수요를 평가 중이며 3월 말까지 가격 변경 여부를 결정하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이는 그동안 가격 인상에 신중했던 무라타가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가격 조정 가능성을 언급한 것이어서 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다. 실제로 이 발언 직후 무라타 주가는 이틀간 10% 급등했다.
AI 서버 한 대에 수십만 개… 폭발적 수요
MLCC는 전자제품 회로에 전류가 안정적으로 흐르도록 제어하는 핵심 부품이다.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스마트폰, 노트북은 물론 AI 서버와 전기차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전자기기에 필수적으로 들어간다. 문제는 AI 서버의 MLCC 수요가 기존 제품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점이다.
스마트폰 한 대에 1,000~1,300개의 MLCC가 들어가는 반면, AI 서버용 컴퓨팅보드에는 장당 1만5,000~2만5,000개가 탑재된다. 최신 AI 서버 플랫폼에 약 20개의 보드가 장착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서버 1대당 수십만 개 수준의 MLCC가 필요한 셈이다. 이종욱 삼성증권 연구원은 “엔비디아의 ‘VR200 NVL72’ 서버에는 기존 ‘GB300’ 서버 대비 30% 이상 증가한 약 60만 개의 MLCC가 탑재될 것으로 추정된다”고 분석했다.
여기에 AI 서버용 MLCC는 고성능 GPU와 대용량 메모리로 인해 전력 밀도가 높아진 환경에서 전압 변동을 안정적으로 제어해야 하기 때문에, 기술 난도가 높은 고용량·고적층 제품이어야 한다. 당연히 가격도 일반 모바일·IT용 제품보다 최소 3배 이상 비싸다.
“주문이 생산능력의 2배”… 공급 부족 장기화
무라타가 가격 인상을 검토하게 된 배경에는 구조적인 공급 부족이 자리하고 있다. 노리오 사장은 “자사의 최첨단 MLCC에 대한 문의가 현재 생산능력의 2배에 달한다”며 “올해와 내년 공급이 매우 타이트할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삼성전기 역시 현재 MLCC 공장 가동률이 90~95%의 풀 캐파시티에 근접한 상황이다.
실제로 MLCC 현물 가격은 지난해(2025년)부터 AI 서버를 중심으로 수요가 급증하면서 20% 가까이 올랐다. 여기에 무라타가 추가 가격 인상에 나설 경우, 업계 2위인 삼성전기를 비롯한 다른 업체들도 가격 인상에 동참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나온다.
더 주목할 점은 이러한 공급 부족이 단기에 해소되기 어렵다는 전망이다. 노리오 사장은 “AI 투자 붐은 최소 3~5년 더 이어질 것으로 보이며, 차세대 AI 칩은 고급 MLCC 수요를 10배 이상 늘릴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일각에서는 2030년까지 AI용 MLCC의 연평균 수요 성장률이 30%를 웃돌 것이라는 전망도 제기된다.
삼성전기, 2년 새 영업익 2배 전망
이러한 수급 환경은 삼성전기의 실적 개선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기는 지난달 실적 발표에서 “올해 1분기 MLCC 평균판매단가(ASP)가 전략 거래선의 스마트폰 신모델 출시와 AI 서버·전장용 제품 등 고부가 제품 수요 확대에 힘입어 전 분기 대비 증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증권가에서는 삼성전기의 MLCC를 담당하는 컴포넌트사업부(전체 매출의 45%)의 영업이익이 2025년 6천억원 초반에서 올해(2026년) 9천억원 안팎, 내년(2027년)에는 1조2,000억원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2년 만에 영업이익이 2배 이상 늘어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삼성전기는 수원과 부산사업장에서 MLCC 연구개발과 원료 생산을 하고, 중국 톈진과 필리핀 생산법인을 대량 양산기지로 운영하고 있다. 현재 기존 IT용 라인을 AI용으로 전환하고 있으며, 필리핀 공장 증설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무라타와 삼성전기 모두 현재 MLCC 공장 가동률이 풀 캐파인 상황”이라며 “생산능력 확대를 위한 투자가 본격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AI 인프라 투자가 반도체를 넘어 부품 생태계 전반의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