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적 위기의 대표 안전자산으로 꼽히던 금이 이란 전쟁 국면에서 오히려 다른 자산보다 더 가파르게 무너지고 있다. 헤지(위험 회피) 수단으로서의 금의 지위에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국제 금 현물가는 개전 직전일인 지난달 27일 이후 약 11~12% 하락한 것으로 보인다. 블룸버그 통신은 24일(현지시간) 이 낙폭이 같은 기간 영국 장기 국채(-11%)와 한국 코스피(-11%)보다 훨씬 크다고 보도했다.
과열의 역습…65% 폭등이 부른 ‘역설적 급락’
시장에서는 이번 하락의 가장 큰 원인으로 2025년 한 해 동안 약 65% 급등한 금값의 ‘과열 해소’를 지목한다. 올해 1월 29일 금은 온스당 5,375.24달러로 고점을 찍었으며, ‘포모(FOMO·소외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심리로 투기 자금이 대거 유입된 상태였다.
전쟁 발발로 시장 변동성이 폭발하자 헤지펀드들은 마진콜(담보가치 하락에 따른 추가 증거금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평가익이 가장 많이 쌓인 금을 우선적으로 매도했다는 분석이다. 야데니 리서치는 “금은 급격한 상승 후 이익 실현의 압박을 받고 있으며, 중동 투자자들도 달러 확보를 위해 금을 매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긴축 공포와 중앙은행 변심…두 겹의 악재
채권 금리 상승도 금의 투자 매력을 낮추는 핵심 변수로 작용했다. 금은 이자가 없는 대표적인 무수익 자산으로, 금리가 오르면 채권 대신 금을 보유하는 기회비용이 커진다. 이란 전쟁으로 국제유가가 급등하자 인플레이션 우려가 고조됐고,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 인하 기대도 빠르게 옅어졌다.
황병진 NH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국제유가 급등에 따른 인플레이션 공포가 긴축 우려를 다시 자극한 결과”라며 “금은 통화정책 완화 국면에서 강세를 보이지만, 긴축 공포가 완화되기 전까지 단기 반등은 제한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금 가격의 주요 버팀목이었던 각국 중앙은행의 태도 변화도 악재로 꼽힌다. 달러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앞다퉈 금을 비축하던 중앙은행들이 전쟁으로 에너지 비용과 국방비 부담이 커지자 금 매각을 검토하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폴란드와 튀르키예 중앙은행은 자국 통화 방어와 재정 확보를 이유로 금 매각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단기 조정일 뿐”…장기 펀더멘털은 견고하다는 평가
물류 차질도 시장을 교란하는 변수로 부상했다. 세계금협회 존 리드 수석 시장 전략가는 “전 세계 금 유통량의 20%가 통과하는 핵심 허브인 두바이에서 대부분의 항공편이 중단되면서 금 공급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공급 차질 우려에도 불구하고 구매자들은 신규 주문을 보류하고 있으며, 거래업자들은 국제 기준가 대비 온스당 최대 30달러 할인된 가격으로 금을 처분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블룸버그는 이번 하락에 대해 “금의 근본적 가치 변화라기보다는 과도한 랠리 뒤 단기적 조정이 찾아온 것으로 보인다”며 “달러에 대한 헤지 도구로서 금의 장기 펀더멘털은 여전히 견고하다”고 평가했다. 전문가들은 유가가 안정을 되찾고 긴축 우려가 잦아드는 시점이 금값 반등의 전제 조건이 될 것으로 분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