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선제공격 이후 사실상 봉쇄 상태였던 호르무즈 해협에서 제한적 통과 사례가 확인됐다. 단순한 선박 한 척의 통과가 아니다. 이란이 ‘선별적 봉쇄’라는 전략 카드를 쥐고 있음을 드러낸 사건이다.
파키스탄국영해운공사(PNSC) 소속 아프라막스급 중형 유조선 ‘카라치’호는 3월 15~16일, 아부다비 다스섬에서 약 70만~80만 배럴의 원유를 적재한 뒤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했다. 선박 운항정보 업체 머린트래픽과 런던증권거래소그룹(LSEG) 자료를 인용한 로이터통신이 17일 보도했다.
2월 28일 미·이스라엘 공습으로 중동 전쟁이 시작된 직후,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는 3월 2일 해협 통과 선박 공격을 예고했다. 이후 상업 유조선의 해협 통과는 사실상 중단됐다. 카라치호는 이 봉쇄 이후 확인된 제한적 통과 사례 중 하나이자 파키스탄 유조선의 첫 확인 사례다.
협상으로 뚫린 해협… ‘선별적 봉쇄’ 전략의 실체
이번 통과의 핵심은 ‘협상’이다. 머린트래픽은 카라치호의 해협 통과에 대해 “일부 화물선이 협상을 통해 안전한 통항을 보장받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밝혔다. 이란 측도 공식적으로 “해협이 완전히 폐쇄된 것이 아니며, 미국·이스라엘 선박에만 폐쇄된 것”이라는 입장을 내놓은 바 있다.
파키스탄 군 소식통은 해군이 이란 해군과 사전 접촉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파키스탄 선박이었기 때문에 호위는 필요 없었다”고 로이터에 말했다. 이는 이란과의 암묵적 양해(tacit understanding)가 존재함을 강하게 시사한다.
스콧 베센트 미국 재무장관도 전날 인도·중국·이란의 일부 유조선이 해협을 통과했다고 미국이 믿는다고 밝혔다. 완전 봉쇄가 아닌, 이란이 외교적 협상을 통해 통항을 허가하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파키스탄의 고난도 줄타기 외교
파키스탄 유조선의 첫 확인 사례가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파키스탄은 이란과 인접국이자, 2025년 사우디아라비아와 상호방위협정을 체결한 국가이며, 미국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다층적 외교 구도 속에 있다.
파키스탄은 지난주 자국 상선 호위를 포함한 항로안전작전에 돌입했고, 해군을 통해 이란과 물밑 접촉을 이어온 것으로 보인다. PNSC의 또 다른 유조선 ‘라호르’호도 사우디아라비아 얀부에서 원유를 적재하고 3일 내 파키스탄에 도착할 예정이다. 파키스탄 재무부는 내달 중순까지 필요한 원유수요량이 확보됐다고 밝히면서도 수입처 다양화에 나서고 있다.
인도 역시 국영 인도해운공사(SCI) 소속 LPG 운반선 ‘시발릭’호와 ‘난다 데비’호를 자국 해군 호위 하에 해협을 통과시켰다. 시발릭호는 이미 문드라항에 도착했고, 난다 데비호는 17일 중 도착 예정이다.
장기화 가능성과 글로벌 에너지 충격
문제는 이 상황이 단기간에 종료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원래 4~5주 걸릴 것으로 예상했지만, 더 오래갈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발언했다. 중기 이상의 봉쇄 지속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호르무즈 해협은 세계 원유 해상 수송량의 20%가 통과하는 전략 요충지다. 봉쇄 장기화 시 대체 항로 운임은 기존 대비 최대 80% 상승하고, 운송 기간은 최대 5일 늘어난다. 2024년 후티 반군의 수에즈 운하 공격 당시 삼성전자의 물류비가 전년 대비 70% 급등한 사례는 이미 선례로 남아 있다.
한국 산업통상자원부는 현재 석유·가스 비축량이 충분하며 LNG의 중동 의존도가 20% 미만이라고 밝혔지만, “봉쇄 장기화 시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해운협회도 3월 2일 HMM·팬오션 등 회원사에 안전조치 준수 공문을 발송하고 전쟁보험 재점검과 비상 대응 훈련을 지시한 상태다.
카라치호의 통과는 호르무즈 해협이 완전히 닫히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이란이 외교적 레버리지로 통항권을 쥐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기도 한다. 해협의 열림과 닫힘은 더 이상 물리적 전투력만의 문제가 아니다. 협상 테이블에서 결정되는 현실이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