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세계 석유 공급량의 약 20%가 통과하는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협상 테이블 위 카드로 올라왔다. 러시아 타스 통신은 4월 9일(현지시간) 이란이 미국과의 휴전 합의에 따라 호르무즈 해협 통과 선박을 하루 최대 15척으로 엄격히 제한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전쟁 전 하루 평균 140척이 통과하던 것과 비교하면 불과 10% 수준이다. 현재 실제로 통과하는 선박은 석유제품선 1척, 건화물선 5척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사실상 봉쇄에 가까운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2월 말 중동 분쟁이 발발한 이후 이란이 해협을 사실상 차단하면서 국제 유가는 급등했다. 이번 ‘제한적 개방’ 조치는 단순한 봉쇄 완화가 아닌, 파키스탄에서 열릴 종전 협상을 앞두고 협상력을 극대화하려는 고도의 전략으로 해석된다.
오만 항로 대신 ‘이란 군사기지 앞바다’로
이번 조치에서 주목할 부분은 통행 척수 제한만이 아니다. 이란은 기존 항로 자체를 바꿨다. 오만 영해를 주로 이용하던 기존 항로 대신, 이란 군사기지가 위치한 라라크섬에 근접한 경로를 새 항로로 지정했다.
이란이 공개한 해도에는 기존 해역이 ‘위험 구역’으로 표시됐다. 이는 단순한 행정적 변경이 아니라, 이란 해군의 감시 범위 안으로 모든 통과 선박을 끌어들이는 해사 주권 확대 전략으로 풀이된다. 모든 선박은 이란 당국의 사전 승인과 특정 프로토콜 이행을 전제로 한 조건부 통항만 허용된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란이 휴전 기간 중 선박 통행료 부과도 검토했다고 보도했다. 전시 외화 확보 수단이자 동시에 통제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는 조치다.
1,000억 달러 자산 동결 해제·미군 증강 금지 요구
이란 고위 소식통은 타스 통신에 휴전의 전제 조건으로 세 가지를 명시했다. 국제사회가 동결한 약 1,000억 달러(약 148조 원) 규모의 이란 해외 자산을 2주 이내에 반드시 해제할 것, 미국은 휴전 기간 중 중동 주둔 병력을 증강하지 말 것, 그리고 우라늄 농축 관련 합의 내용을 이란 측이 엄격히 준수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이 세 조건은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협상 이행의 검증 수단이자 압박 기제다. 이란이 해협 통제권을 손에 쥔 채 협상 테이블에 앉겠다는 의도가 명확히 드러난다.
언제든 ‘전면 봉쇄’ 전환 가능…글로벌 공급망 긴장 지속
폭 34km에 불과한 호르무즈 해협은 원유뿐 아니라 비료 등 필수 재화가 인도양으로 나가는 유일한 해상 통로다. 하루 15척 제한이 유지되는 한 국제 에너지 시장과 글로벌 공급망에 대한 상승 압력은 해소되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이 15척 제한조차 언제든 전면 봉쇄로 전환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습 직후 이란이 ‘해협 재봉쇄’를 거론했다는 점은 현 휴전 체계의 취약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중동 정세가 한 번 더 악화된다면, 호르무즈 해협은 다시 완전히 닫힐 수 있다.
이란의 ‘제한적 개방’ 전략은 국제사회에 선의를 표시하면서도 실질적인 통제권을 유지하는 이중 구조다. 파키스탄 종전 협상의 향방에 따라 세계 에너지 질서가 요동칠 수 있는 상황에서, 호르무즈 해협은 군사적 요충지를 넘어 지정학적 협상의 핵심 무기로 기능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