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국적 유조선 40척이 호르무즈 해협 인근 해상에서 발이 묶였다. 이란 혁명수비대가 “단 한 방울의 석유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겠다”며 봉쇄를 선언한 3월 2일 이후, 세계 석유 거래량의 20~30%가 통과하는 이 해협은 사실상 마비 위기에 놓였다. 한국이 수입하는 중동산 원유의 95%가 이 좁은 해협을 지나는 상황에서 시장의 불안감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정부는 4일 국회 간담회를 통해 “현재 석유 비축량은 민관 합쳐 약 1억9천5백만 배럴로 208일분에 달한다”며 단기 수급에는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가스 역시 의무비축량 9일분을 훨씬 상회하는 수준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3일 만에 휘발유 가격이 2.2% 급등하고, 장기화 시 경제성장률이 0.45%포인트 하락할 수 있다는 시뮬레이션이 나오면서 투자자들의 경계심은 높아지고 있다.
한국 원유의 ‘생명줄’ 막혔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얼마나 심각한 사태인지는 숫자로 명확히 드러난다. 한국이 수입하는 원유의 69.1%가 중동산이며, 이 중 95%가 호르무즈 해협을 경유한다. 사우디아라비아(33.6%), 미국(17.0%), 쿠웨이트, 이라크, 아랍에미리트(UAE) 등에서 들여오는 원유 대부분이 이 해협을 통과해야 한다는 의미다.
서울 주유소의 휘발유 평균 가격은 2월 28일 리터당 1,750원에서 3월 4일 1,788원으로 38원 이상 올랐다. 통상 국제유가 변동이 국내에 반영되기까지 1~2주가 걸리는데, 이번엔 3일 만에 급등했다. 한국석유공사 오피넷 관계자는 “시장의 위기 심리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가격에 반영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208일 버티는 동안 ‘플랜B’ 가동
정부는 비축유 208일분을 확보하고 있지만, 사태 장기화에 대비한 다층적 대응책을 마련 중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수급 위기가 악화할 경우 9개 비축기지에서 자체 상황판단회의를 거쳐 시장에 신속 공급할 계획이다.
더 근본적인 해법은 수입선 다변화다. 한국은 2025년 한미 관세 협상에서 2028년까지 1,000억 달러 규모의 미국산 에너지를 구매하기로 합의했다. 이미 미국은 사우디에 이어 두 번째 원유 수입국(17.0%)이며, 호르무즈 사태를 계기로 미국산 비중은 더 늘어날 전망이다. 한국석유공사는 해외 생산분 도입과 공동비축 우선구매권 행사도 준비 중이다.
이호현 기후에너지환경부 2차관은 파티 비롤 국제에너지기구(IEA) 사무총장과 긴급 화상회의를 갖고 “국제 공조를 통한 공급망 안정화”를 논의했다. 정부 관계자는 “IEA 등 국제기구와 지속적으로 협의하며 대응력을 높여가고 있다”고 전했다.
투자자들이 주목하는 ‘스태그플레이션’ 시나리오
시장이 가장 우려하는 건 사태의 장기화다. 현대경제연구원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호르무즈 해협이 수개월 이상 봉쇄될 경우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0.3%포인트 하락하고 소비자물가는 1.1%포인트 상승한다. 시티 이코노미스트 김진욱은 브렌트유 배럴당 82달러를 가정했을 때 “성장률 0.45%포인트 하락, 물가 0.6%포인트 상승 압력”을 예상했다.
물가는 오르는데 경기는 침체되는 ‘스태그플레이션’ 우려가 시장에 확산되는 이유다. 정유, 석유화학, 해운 등 에너지 관련 업종은 단기적으로 유가 상승 수혜를 볼 수 있지만, 원가 부담이 큰 제조업과 소비재 기업들은 수익성 악화를 피하기 어렵다는 분석이 나온다.
여한구 산업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은 국회 간담회에서 “나프타, 플랜트 등 주요 수출입 품목을 주시하며 다양한 컨틴전시 플랜을 작성 중”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국민들께서는 과도한 우려보다는 평상시처럼 경제 활동을 해주시길 바란다”며 시장 심리 안정화에 나섰지만, 투자자들은 208일 이후의 시나리오까지 염두에 두고 포트폴리오를 점검하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