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르무즈 해협 봉쇄 우려와 중국의 나프타 수출통제가 맞물리며 에너지 수급 비상이 걸린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중동·중앙아시아 4개국 순방을 통해 원유 2억7300만 배럴과 나프타 210만 톤을 확보했다.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이 이끄는 전략경제협력 대통령 특사단이 4월 7일부터 14일까지 7일간 사우디아라비아·오만·카자흐스탄·카타르를 방문한 결과다.
이번에 확보한 원유 물량은 국내 일일 평균 정제 처리량인 약 280만 배럴을 기준으로 환산하면 약 100일분, 즉 3개월 이상 사용할 수 있는 규모다. 일본도 원유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성과라는 점에서 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다.
국가별 물량 쪼개보니…사우디 ‘메인’, 카자흐·오만 ‘보완재’
확보 물량의 대부분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나왔다. 기존 선적이 불확실했던 5000만 배럴을 대체 항만을 통해 5월까지 우선 공급받기로 했고, 6월부터 연말까지 추가로 2억 배럴이 한국에 우선 배정된다. 카자흐스탄에서는 1800만 배럴, 오만에서는 500만 배럴과 나프타 160만 톤을 별도로 확보했다.
카타르와는 액화천연가스(LNG) 계약 이행 의지를 재확인하며 가스 부문까지 에너지 포트폴리오 안정성을 넓혔다. 특히 카자흐스탄과는 고위급 직접 소통 채널을 신규 구축해, 중앙아시아 공급망에 대한 외교적 기반도 마련했다.
‘가격보다 확보 여부가 먼저’…전문가들, 양적 성과에 무게
에너지 전문가들은 이번 성과의 의미를 ‘단기 완충 장치’ 확보에서 찾는다. 장태훈 에너지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전 세계적으로 원유 수급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확보된 물량이라는 점에서 양적 측면만으로도 성과를 부정하기 어렵다”며 “단기 공급 충격을 완화하는 완충 장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는 파급효과에 주목했다. “원유가 안정적으로 도입돼야 미국이나 호주로의 항공유 수출도 가능해지고, 이는 우리 경제에 중요한 레버리지로 작용할 수 있다”며 “현재로서는 가격보다 확보 여부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다만 장태훈 부연구위원은 “도입 원유의 유종(경질유·중질유)에 따라 실제 활용도와 체감 효과는 달라질 수 있다”는 점도 함께 짚었다.
나프타 확보에 대해서도 긍정적 평가가 이어졌다. 박주현 동덕여대 경제학과 교수(전 에너지경제연구원 원장)는 “비닐 공급 부족 문제 등 국내 공급망 안정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이번 물량 확보와 함께 추경 예산 6744억 원을 투입해 기업의 나프타 수입 단가 상승분 50%를 보조하기로 했으며, 4월 1일로 소급 적용된다.
호르무즈 탈피 ‘첫발’…비축기지 확대·공급망 다변화 병행
이번 특사단 성과는 단기 수급 대응을 넘어 에너지 공급 구조 전환의 신호탄으로도 해석된다. 이번에 확보한 물량은 호르무즈 해협을 거치지 않는 대체 공급선을 중심으로 구성됐으며, 정부는 우회 송유관 활용과 홍해 인접 항만 선적 등 복수의 경로를 병행해 지정학적 리스크를 최소화한다는 방침이다.
국제공동비축사업 확대도 중장기 전략으로 주목받는다. UAE 등 주요 산유국들은 한국의 석유 비축기지를 활용하는 방안을 정부와 협의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산유국이 원유를 국내 시설에 저장하고 위기 시 한국이 우선 구매권을 행사하는 구조로, 사실상 간접 비축 효과를 갖는다.
유승훈 교수는 “석유 비축은 일종의 외환보유고처럼 국가 신인도와 경제력을 보여주는 지표”라며 “국제공동비축 물량은 많이 유치할수록 유리하다”고 설명했다. 장태훈 부연구위원도 “미국과 남미 등 비중동 지역으로 원유 도입을 확대하는 공급망 다변화 노력이 병행되고 있다”며 에너지 안보 강화를 위한 중장기 전략 차원의 의미를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