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호황의 역설이 서민 가계를 옥죄고 있다. DDR5 16GB 기준 D램 가격이 지난해 1분기 3.9달러에서 올해 29.5달러로 불과 1년 새 7.5배 넘게 치솟으면서, 컴퓨터 소비자물가지수는 전년 대비 12.4% 상승해 2개월 연속 두 자릿수 오름세를 이어가고 있다.
여기에 중동 전쟁 여파로 국제유가가 배럴당 110달러 안팎까지 급등하고, 국내 휘발유 가격은 리터당 1968원(7일 기준)까지 치솟으며 물가 불안이 전방위로 확산하는 양상이다.
이에 정부는 8일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주재로 ‘민생물가 특별관리 관계장관 TF’를 열고, 통신비·PC·식품·공공요금을 아우르는 종합 물가 안정 대책을 발표했다.
물가 전망 줄줄이 상향…에너지·공산품 동반 급등
지난달 소비자물가는 전년 대비 2.2% 상승했으나, 물가 전망은 가파르게 높아지고 있다. 주요 투자은행(IB) 8곳의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는 2월 말 평균 2.0%에서 3월 말 2.4%로 0.4%p 뛰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7%, 아세안+3 거시경제조사기구(AMRO)는 2.3%로 각각 직전 전망 대비 0.9%p, 0.4%p 상향 조정했다. 국제유가 110달러대가 지속될 경우 2분기 물가 상승률이 3%를 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이 나온다.
에너지 외 공산품 가격도 동반 상승세다. 지난달 나프타 파생 원료인 폴리에틸렌(PE) 가격은 20~50%, 페인트 용제는 55% 각각 오르며 공업물품 물가지수가 1985년 1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강기룡 재경부 차관보는 “최고가격제를 시행하지 않았다면 지난달 물가 상승률은 2.8%를 기록했을 것”이라고 밝혀, 에너지 가격 규제만으로는 대응에 한계가 있음을 시사했다.
‘AI 슈퍼사이클’이 서민 PC 가격까지 밀어올려
반도체 가격 급등의 배경으로는 AI 서버 수요 폭발이 꼽힌다. 2025년 중반부터 AI 데이터센터용 고대역폭메모리(HBM)와 일반 D램 수요가 동시에 급증하며 공급 부족이 전방위로 확산했다. 업계에서는 D램 계약가격이 2분기에도 60% 추가 상승할 수 있다고 내다본다.
이 같은 메모리 가격 상승은 주요 제조사의 PC·노트북 판매가격 동반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디지털 양극화’가 심화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정부는 이에 대응해 연간 8만여 대 발생하는 불용 PC 중 약 25% 수준인 무상 양여 비율을 대폭 확대하고, 저소득층 학생 대상 PC·노트북 구매 지원 단가(현행 104만 2000원)도 상향 추진한다. 지방교육재정교부금 4조 8000억 원을 활용해 각 시도교육청의 지원 확대도 유도할 계획이다.
통신비 연간 3700억 절감…2만원대 5G 요금제 나온다
가계 통신비 절감 대책도 이번 물가 대책의 핵심으로 꼽힌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통신 3사의 모든 LTE·5G 요금제에 요금 인상 없이 약 400Kbps 속도로 데이터를 지속 사용할 수 있는 ‘안심 옵션(QoS)’을 의무화한다. 약 717만 명이 혜택을 받아 연간 약 3221억 원의 절감 효과가 기대된다.
만 65세 이상 어르신에게는 음성·문자 무제한 요금제를 제공해 약 140만 명, 연간 590억 원 절감 효과가 예상된다. 특히 약 2만 7000원대의 5G 저가 요금제가 출시되며, 향후 알뜰폰(MVNO)에도 적용 여부를 검토할 예정이다.
경제학계에서는 이번 통신비 완화 조치가 물가 안정에 실질적 효과를 낼 것으로 분석한다. 정세은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통신비를 낮추면 물가 안정에도 일정 부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 역시 “통신비는 주요 지출 항목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를 낮출 수 있다면 물가 안정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밝혔다. 시장에서는 이번 통신비 절감 효과가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0.1~0.2%p 수준 제어할 수 있을 것으로 분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