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지정학적 긴장이 에너지 시장을 강타하고 있다. 이란의 해협 봉쇄 위협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해군 호위를 약속했지만, 원유 운송 비용은 2주 만에 2배로 뛰며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시장은 트럼프의 말보다 실제 리스크에 반응하고 있는 모습이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미국 걸프 지역에서 중국까지 대형 유조선으로 200만 배럴 규모의 원유를 운송하는 비용이 3월 4일 기준 2천900만달러(약 424억원)를 기록했다. 이는 불과 2주 전보다 갑절이 뛴 수치로, 배럴당 14.50달러에 달한다. 이는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 가격(배럴당 약 75달러)의 20%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보험 시장의 공포는 더욱 극명하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호르무즈 해협을 운항하는 선박에 적용되는 보험 프리미엄이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 전 0.25%에서 4일 기준 3%로 12배 폭등했다고 전했다. 초대형 유조선(VLCC) 운임도 연초 2만8700달러에서 3월 4일 49만3100달러로 17배나 급등했다.
트럼프 약속에도 ‘불확실성’ 여전
트럼프 대통령은 유가 급등 우려가 커지자 지난 3일 트루스소셜을 통해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는 유조선에 미 해군의 호위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시장의 불안감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영국 보험 중개업체 맥길의 데이비드 스미스 해상 총괄은 FT와의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트루스소셜 글 외에 미국 정부로부터 나온 구체적인 내용이 전혀 없다”며 “유럽 유조선이 중국산 석유를 나르는 경우에도 군사적 보호를 제공한다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불확실성이 여전하다”고 지적했다.
해상 운송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현실성에 대한 회의론도 제기된다. FT는 호르무즈 해역을 지나는 모든 유조선에 미 해군 호위를 제공하려면 막대한 수의 군함과 군 전력이 필요해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분석이 나온다고 전했다.
유조선 예약 ‘줄줄이 취소’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실물 시장에서는 거래 취소 사태가 속출하고 있다. 블룸버그는 중동 사태 여파로 해상 운임이 요동치면서 미국 걸프 연안에서 원유를 실어 나르는 대형 유조선들의 예약건이 줄줄이 취소되고 있다고 전했다. 선박 중개업체 탱커스인터내셔널에 따르면 이번 주 시장에서 논의되던 대형 유조선 예약건 중 상당수가 지난 24시간 사이 무산됐다.
태국 정유업체 PTT는 최근 유조선 한 척을 2천900만달러에 임시 예약했으나, 해당 거래는 결국 취소된 것으로 파악된다. 유조선 품귀 현상이 심화되면서 하루 배를 빌리는 비용(용선료)이 최첨단 시추 설비의 임대료에 육박하는 기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유가 100달러 돌파 ‘임박’
시장조사기관 블룸버그 이코노믹스는 미국이 호르무즈 해협 운항을 수일 내 정상화하지 못할 경우 국제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국제 유가의 대표 기준점인 브렌트유 선물 가격은 5일 오전 9시40분 현재 배럴당 81.40달러로, 미국의 이란 공격 전날인 지난 달 27일 종가(72.48달러) 대비 12.3% 상승한 상태다.
전 세계 원유 물동량의 27%가 지나가는 호르무즈 해협은 페르시아만의 입구에 위치한 전 세계 에너지 동맥이다. 이란은 미국과 이스라엘이 지난 달 28일 공습을 시작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고 이곳을 지나는 선박을 격침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장기화할 때 유가 급등에 따른 인플레이션 압력이 기업의 생산 비용을 직접적으로 끌어올릴 것”이라며 “특히 물류비 부담이 업체들의 수익성 악화와 기업 경영의 불확실성 요인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국은 원유의 70% 이상을 중동에서 수입하고 있어, 우회 루트 비용 증가는 국내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직결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