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기 한 통이 평소보다 8배 비싸졌다. 그 틈을 파고든 사기꾼들이 동물병원을 상대로 ‘재고가 있다’며 돈을 가로채고 있다.
중동 정세 불안이 석유화학 원료 공급망을 흔들면서 폴리프로필렌(PP) 기반 반려동물용 의료 소모품 수급에 심각한 차질이 빚어졌다. 이를 악용한 판매 사기가 전국 동물병원으로 번지고 있어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선입금 받고 잠적… 실제 업체 사칭까지
대한수의사회에 따르면 사기범들은 동물병원에 전화를 걸어 “주사기 재고가 있다”고 속인 뒤 대량 구매를 유도하고, 선입금을 받는 즉시 연락을 끊는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수법은 날로 치밀해지고 있다. 포털사이트에 실제로 등록된 업체 명칭을 도용해 영업사원을 사칭하는 방식이 확인됐다. 울산과 광주 지역 동물병원들은 이미 관련 피해를 경찰에 신고한 상태다.

피해는 동물병원에만 그치지 않는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반려동물 양육 가구들의 피해 호소 글이 잇따르고 있다. “주사기와 나비침을 결제했지만 ‘배송 완료’로 표시된 뒤 물건이 오지 않는다”, “‘배송 예정’ 표시만 뜨고 판매자와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글들이 속출하고 있다.
공급가 최대 8배… 정부, 매점매석 금지 고시 발령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은 원자재 가격 폭등이다. 중동 사태로 나프타(Naphtha) 공급에 차질이 빚어지면서 주사기·수액팩 등 PP 기반 의료용품 공급가가 평소보다 3~4배 뛰었고, 일부 품목은 최대 8배까지 치솟았다.
가격 인상 움직임도 포착됐다. 의료기기 업체 한국백신은 거래 의료기관에 15~20% 가격 인상을 공지했으나 시장 불안을 고려해 잠정 보류한 상태다. 전문가들은 수액 공급이 당장 중단될 수준은 아니라고 평가하면서도, 중동 사태가 장기화될 경우 의료 폐기물 용기·봉투 등 플라스틱 기반 의료기기 전반으로 공급 불안이 확산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정부는 보건복지부·식약처·산업부·농림축산식품부가 범부처 협력 체계를 구성하고 ‘의료기기 매점매석행위 금지 고시’를 발령했다. 주사기 4종과 주사침 3종을 대상으로 과도 보유 및 판매 기피 행위를 집중 단속하고 있다.
광견병 예방접종도 차질… 수의계 자체 대응 나서
공급난의 여파는 공중 보건 영역으로도 번졌다.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봄철 광견병 예방접종 사업이 주사기 확보 문제로 차질을 빚자 사업 기간 연장이나 일정 조정을 검토 중이다.
대한수의사회는 4월 21일 오후 전국 회원 병원에 ‘주사기 판매 사기 사례 주의 안내’ 긴급 공문을 발송했다. 협회는 “기존 거래처가 아닌 곳에서 판매 제의를 받을 경우 업체 대표번호와 취급 품목, 담당자 재직 여부 등을 반드시 재확인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특히 선입금 거래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것을 강조했다.
협회는 현재 정부가 주사기 생산·유통 과정을 면밀히 점검하고 있어 업체가 임의로 대량 판매하기 어려운 상황임을 분명히 하며, 이른 시일 내에 별도의 추가 공급 방안을 안내할 예정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