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동 전쟁 장기화로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 안팎에서 좀처럼 내려오지 않는 가운데, 한국 정부가 물가 방어를 위해 설계한 석유류 최고가격제가 오히려 재정의 ‘블랙홀’로 변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정부는 국제유가가 배럴당 90달러 수준으로 안정되면 정책 종료를 검토하겠다고 밝혀왔다. 그러나 주요 글로벌 금융기관들이 2027년까지도 고유가가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을 잇달아 내놓으면서, 정부의 출구전략은 사실상 봉쇄된 형국이다.
HSBC·바클레이즈·캐피탈 이코노믹스, 유가 전망 일제히 상향
홍콩상하이은행(HSBC)은 최근 2026년 브렌트유 평균 가격 전망을 배럴당 95달러로 제시했다. 직전 전망인 80달러에서 15달러 상향 조정한 수치다.
이는 호르무즈 해협 통행이 6월 재개되고 3분기 내 공급망이 정상화된다는 낙관적 전제를 바탕에 깐 수치다. 전쟁이 지속될 경우 2026년 평균은 110달러, 공급 차질이 6개월 이상 이어지면 120달러까지 오를 수 있다고 HSBC는 분석했다.
바클레이즈도 이달 초 2026년 브렌트유 전망치를 배럴당 100달러로 상향 조정했다. 리서치 전문기업 캐피탈 이코노믹스는 전쟁이 확전되는 극단적 시나리오에서 브렌트유가 150달러를 넘어 2027년까지 지속될 가능성도 제기했다.
이 경우 선진국 물가상승률이 2.5%포인트(p) 추가 상승할 것으로 분석됐다. 기관들이 전망치를 높이는 배경에는 실제 공급 차질이 자리한다.
하루 600만 배럴 부족…재고 2억5000만 배럴 증발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2026년 4월 OPEC+ 생산량은 하루 4010만 배럴로 전월 대비 190만 배럴 감소했다. 전쟁 이전과 비교한 감소 폭도 확대된 상태다.
IEA는 글로벌 공급 부족 규모가 하루 약 600만 배럴에 달하며, 3~4월 두 달간 전 세계 석유 재고가 총 2억 5000만 배럴 줄었다고 전했다. 시장에서는 재고 소진이 빨라질수록 가격의 하단이 높아지는 구조라는 점에서, 고유가 압력이 단기간에 해소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한다.
HSBC는 “중단 기간이 길어질수록 재고 소진이 증가하고, 잔여 위험 프리미엄이 높아져 장기적으로 더 높은 가격을 형성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추경 4.2조 원 투입에도 출구전략 안갯속
정부는 추가경정예산(추경)을 통해 4조 2000억 원을 편성하고, 6개월간 석유류 최고가격제를 시행할 방침이다. 국제유가 상승분과 국내 판매가격 간 차액 일부를 정부 재정으로 보전하는 구조다.
문제는 국제유가와 국내 최고가격 간 격차가 벌어질수록 보전 비용도 빠르게 늘어난다는 점이다. 업계에서는 최고가격제 시행 이후 정유·유통업계의 누적 손실이 이미 3조 원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고유가가 2026~2027년까지 장기화될 경우, 소비자물가 상승률 기여도가 2026년 1.6%p, 2027년 1.8%p에 달할 것으로 분석했다. 이는 에너지 가격이 운송·물류·원재료비를 통해 서비스와 공산품 전반으로 확산되는 구조 때문이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 수준을 유지하는 상황에서 정부 입장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다”며 “최고가격제를 유지하기 어려운 시점에는 유류세 인하 등 다른 대책을 병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재정경제부 관계자는 “예산 투입 규모와 국제유가 수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최고가격 유지 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고유가 장기화 시나리오가 현실이 될 경우, 정부는 재정 건전성과 물가 안정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난제를 떠안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