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 비상 상황을 대비해 국내 비축기지에 보관 중이던 원유 90만 배럴이 정부의 우선구매권 행사 직전 해외로 팔려나가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에너지 안보의 최후 보루로 여겨지던 국제공동비축 시스템에 심각한 허점이 드러난 것이다.
20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한국석유공사가 울산 석유 비축기지에 보관 중이던 해외 기업 A사의 원유 약 90만 배럴에 대해 우선구매권을 즉시 행사하지 않은 사이, 해당 물량이 해외로 판매된 것으로 확인됐다. 산업부 관계자는 “현재 해당 90만 배럴에 대한 물량 확보는 불가능한 상태”라고 밝혔다.
비상구가 잠겨 있었다… 국제공동비축 제도란
‘국제공동비축 사업’은 석유공사가 국내 비축 시설을 임대해 산유국 등의 원유를 저장해 주되, 수급 위기 시 한국 정부가 해당 물량을 우선적으로 사들일 수 있는 권리를 갖는 제도다. 1999년부터 국내 석유 수급 안정을 위한 핵심 장치로 운용돼 왔다.
이번 사태는 미국과 이란 간의 군사 긴장 고조로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며 원유 수급에 차질이 빚어지는 긴박한 상황에서 발생했다. 한국은 도입 원유의 60% 이상을 중동에 의존하고 있으며, 호르무즈 인근 해역에는 한국 국적 유조선 약 40척이 대기 중인 상황이었다.
국제유가 배럴당 110달러 돌파… 안전장치는 무용지물
호르무즈 봉쇄 직후 국제유가는 배럴당 한때 110달러를 돌파하며 전주 대비 70% 이상 급등했다. 국내 서울 평균 휘발유 가격도 2월 28일 리터당 1,750원에서 3월 3일 1,788원으로 2.2% 상승하는 등 에너지 가격 충격이 현실화됐다.
정부가 국내 보관 중인 국제공동비축 원유 확보를 위해 우선구매권 행사에 나섰으나, 정작 울산 기지에 있어야 할 90만 배럴은 이미 해외로 팔려나간 뒤였다. 에너지경제연구원 전문가는 앞서 “비축량을 푸는 순간 대응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 없어지기 때문에 비축유 방출은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번 사건은 바로 그 ‘마지막 수단’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 사례로 평가된다.
감사 착수… 제도적 허점 메울 수 있나
산업부는 이번 사태를 국가 에너지 안보 체계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석유공사에 대한 감사에 즉각 착수했다. 비상 상황에서 우선구매권 행사 시기를 놓친 경위와 관리 소홀 여부를 집중 조사할 계획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조사 결과 규정 위반이나 업무 태만이 드러날 경우 관련자들을 엄중히 문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에너지 업계에서는 이번 사건이 석유공사의 행정 지연과 제도적 허점이 맞물린 결과로, 단순한 과실 책임을 넘어 국제공동비축 제도 전반의 실행성 점검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분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