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동발 지정학적 충격이 국내 물가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석유제품 가격이 한 달 만에 31.9%나 치솟으며, 약 29년 전 IMF 외환위기 이후 가장 가파른 상승세를 기록했다.
한국은행이 4월 22일 발표한 ‘2026년 3월 생산자물가지수(잠정)’에 따르면 지난달 생산자물가지수는 125.24(2020년=100)로 전월 대비 1.6% 올랐다. 이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후인 2022년 4월(1.6%) 이후 가장 높은 상승률이다.
생산자물가는 지난해 9월부터 7개월 연속 오름세를 이어가고 있으며, 3월에는 상승 폭이 한층 더 가팔라졌다. 에너지발 충격이 공산품 전반으로 확산하는 양상이다.
석유제품, 외환위기 이후 최대 상승…화학·반도체도 동반 급등
이번 물가 상승을 이끈 핵심은 공산품으로, 전월 대비 3.5% 상승했다. 그중 석탄 및 석유제품이 31.9% 급등하며 전체 지수를 끌어올렸다. 이 수치는 1997년 12월 IMF 외환위기 당시의 57.7% 이후 가장 높은 수준으로, 2022년 러·우 전쟁 당시보다도 상승 폭이 크다.
화학제품도 전월 대비 6.7% 올랐다. 유가 상승이 나프타 등 원재료 가격을 자극하고, 이것이 다시 화학 제품 생산 비용을 높이는 연쇄 효과가 나타난 것으로 분석된다.
반도체는 전월 대비 9.8%, 전년 동월 대비 94.1% 상승하며 9개월 연속 오름세를 유지했다. 에너지 충격과 반도체 강세가 동시에 진행되며 공산품 물가 전반에 상방 압력이 집중되는 모습이다.
‘원재료→중간재→소비자’ 시차 파급…3~4개월 뒤 물가 압박 현실화 전망
시장에서 주목하는 것은 생산자물가 상승이 소비자물가로 전이되는 시차 효과다. 한국은행 이문희 물가통계팀장은 “생산자물가가 소비자물가에 영향을 주는 시차는 품목에 따라 거의 동행하는 경우도 있고, 3~4개월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 팀장은 또 “나프타 같은 품목은 다른 석유·화학 제품들의 생산 비용에 영향을 미쳐 시차를 두고 소비자물가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며 “3월의 큰 폭 상승은 소비자물가의 상방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국내공급물가지수는 원재료(5.1%)와 중간재(2.8%)가 오르며 전월 대비 2.3% 상승했다. 총산출물가지수도 공산품 급등 영향으로 전월 대비 4.7%, 전년 동월 대비 9.0% 올랐다. 원재료와 중간재 단계에서의 가격 상승이 최종 소비재로 이어지는 구조적 흐름이 확인되는 대목이다.
농산물은 하락, 서비스는 보합…에너지 충격이 물가 양극화 심화
반면 농림수산품은 전월 대비 3.3% 하락했다. 농산물(-5.0%)과 축산물(-1.6%), 수산물(-2.0%)이 동반 하락하며 생산자물가 상승을 일부 상쇄했다. 서비스 물가는 보합을 기록했는데, 음식점 및 숙박서비스(0.1%)는 소폭 올랐으나 운송서비스(-0.2%)와 금융·보험서비스(-0.2%)가 내렸다.
식료품 및 에너지를 제외한 근원 생산자물가는 전월 대비 1.6%, 전년 동월 대비 4.5% 상승했다. 에너지 충격이 근원물가에까지 침투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은행의 물가 관리 부담이 한층 커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 팀장은 “기업의 경영 여건, 시장 상황, 정부의 정책 등에 따라 불확실성이 높은 상황이기 때문에 향후 흐름을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경제 전문가들은 중동 정세 불안이 장기화할 경우 기대인플레이션을 자극해 물가 상승 압력이 여타 품목으로 확산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