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석유화학 산업의 핵심 원료인 나프타(납사) 수급에 비상이 걸렸다. 지난달 28일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으로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봉쇄되면서, 국내 수입 나프타의 54%를 공급하던 중동 루트가 막혔기 때문이다.
정부가 수출 통제 카드를 꺼내들었지만, 근본적인 대체 물량 확보에는 여전히 난관이 산적해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플라스틱·비닐에서 전자·자동차 전방 산업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수출 금지 시행…그러나 효과는 ‘제한적’
정부는 지난 23일 나프타를 경제안보 품목으로 지정하고, 27일부터 ‘나프타 수출제한 및 수급 안정을 위한 규정'(고시)을 시행했다. 이에 따라 국내 생산·보유 나프타의 수출은 원칙적으로 금지되고, 산업통상자원부가 시장에 직접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됐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수출 통제만으로는 효과가 제한적이라고 지적한다. 정유사 생산 나프타 중 수출 비중은 약 11% 수준이며, 이달 1~25일 수출된 물량은 약 19만 9636톤으로 월평균 국내 소비량(약 400만 톤)과 비교하면 확보 가능한 물량은 많지 않다. 나프타는 원유 정제 과정에서 생산되는 만큼, 원유 공급 자체가 원활하지 않으면 수출 제한의 효과도 반감될 수밖에 없다.
석유화학 업계, 가동률 줄이며 ‘버티기’ 돌입
현재 국내 석유화학 업계가 보유한 나프타 재고는 2~3주 분량에 불과하다. 이에 주요 기업들은 잇따라 생산을 축소하는 방어적 대응에 나섰다.
LG화학은 지난 23일부터 연산 80만 톤 규모의 여수 2공장 가동을 중단했고, 롯데케미칼은 정기 보수 작업을 3주 앞당겨 27일부터 실시했다. 여천NCC는 프로필렌 전용 공장을 멈추고 NCC 가동률을 60%까지 낮춘 상태다. LG화학·롯데케미칼·한화솔루션 등은 이미 고객사에 불가항력 선언 가능성을 통보했으며, 업계에서는 4월 중순을 지나면 NCC 가동률이 30~40%대까지 추락할 수 있다는 위기감도 나온다.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이 국내에 도착하기까지 약 23일이 소요되는 만큼, 해협이 당장 열린다 해도 수급 정상화는 4월 말 이전에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분석이다.
러시아산 나프타·비축유 방출…실현까지는 ‘산 넘어 산’
정부가 가장 주목하는 대안은 러시아산 나프타 도입이다. 미국이 러시아산 석유류 제품에 대한 제재를 한 달간 한시적으로 완화함에 따라, 정부는 위안화·루블화·디르함화 등 달러 외 통화로 결제가 가능하다는 점을 미국 재무부와 협의해 확인했다. 구윤철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은 “러시아든 다른 나라든 정부가 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최선을 다해 나프타 물량을 확보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실현 가능성에 물음표를 달고 있다. KB증권은 수입 가능한 러시아산 나프타 총량을 22만~25만 톤으로 분석했는데, 이는 한국의 2~3일치 수요에 불과하다. EU의 2차 제재 불확실성이 남아 있고, 한 달이라는 제재 완화 기한 내에 대금 지급과 입고까지 마무리하기 빠듯하다는 점도 걸림돌이다. 정부는 4월 중순 비축유 방출도 계획하고 있으며, 원유 배합 및 증류 공정을 조정하는 ‘스윙 운전’으로 나프타 수율을 높이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정부와 청와대는 나프타를 국가 비축 품목으로 지정하는 법 개정도 검토에 나섰다. 현행법상 비축 품목은 원유·휘발유·경유 등으로 한정돼 있어, 나프타는 외부 충격에 고스란히 노출돼 있었다는 것이 이번 사태의 구조적 허점으로 지목된다. 산업부 관계자는 “기업들로부터 보고를 받아 위험한 상황이 감지되면 수급 조정 명령에 들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