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국제유가가 심리적 저항선인 배럴당 100달러를 뚫었다. 미국과 이스라엘, 이란 간 전쟁이 격화되면서 세계 원유 수송의 핵심 통로인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마비 상태에 빠진 여파다. 미국 뉴욕상품거래소에서 4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 가격은 한국시간 이날 오전 7시 26분 기준 전장 대비 14.85% 오른 배럴당 107.54달러를 기록했다. WTI는 한때 111.24달러까지 치솟았다.
WTI 가격이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선 것은 2022년 7월 이후 처음이다. 국제 유가 기준인 브렌트유 역시 같은 시각 영국 런던 ICE 선물거래소에서 14.85% 급등한 배럴당 107.54달러에 거래됐으며, 한때 111.04달러까지 상승했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배럴당 80달러 선에서 안정세를 보이던 국제유가가 30% 가까이 뛴 것이다.
호르무즈 해협 “사실상 봉쇄”… 일주일 만에 통행량 90% 증발
원유 시장 혼란의 진원지는 호르무즈 해협이다. 전 세계 해상 원유 교역량의 34%, LNG 교역량의 20%가 통과하는 이 해협이 지난달 28일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공습 이후 사실상 봉쇄됐다. 에너지 컨설팅회사 크플러에 따르면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유조선 통행량은 공습 후 일주일 만에 90% 급감했다. 블룸버그는 최근 며칠간 이 해협을 통과한 선박은 이란 관련 유조선들과 중국 소유 벌크선 두 척뿐이었다고 보도했다.
호르무즈 해협은 이란과 오만 사이에 위치한 폭 55km의 좁은 수로로, 실제 선박 통행 가능 구간은 10km 이내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 전 구간이 이란 영해에 속한다는 점이다. 국제해사기구(IMO)는 일주일간 호르무즈 해협에서 총 9건의 선박 공격이 발생했으며, 이로 인한 사망자가 7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원유 물류는 사실상 마비 상태다. 일일 약 2,000만 배럴의 원유가 이 해협을 통과했으나, 현재는 우회 루트로 최대 260만 배럴만 수송 가능한 상황이다.
중동 산유국들 “저장시설 포화”… 이라크 수출 75% 급감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수출길이 막히면서 중동 산유국들의 저장시설이 빠르게 포화 상태에 이르고 있다. 로이터 통신은 소식통을 인용해 이라크 주요 남부 유전에서 생산되는 원유량이 이전의 3분의 1 수준인 하루 130만 배럴로 줄었다고 보도했다. 이라크의 원유 수출량도 급감했다. 지난달 333만 배럴 수준이던 하루 수출량이 이날 80만 배럴로 추락했다. 호르무즈 해협 통행이 불가능해지면서 유조선 두 척만 선적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한국 역시 직격탄을 맞았다. 한국은 전체 수입 원유의 69.1~71.5%를 중동에서 들여오며, 이 중 95% 이상이 호르무즈 해협을 경유한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청취한 바에 따르면 HD오일뱅크·GS칼텍스 소속 유조선 7척이 현지에 억류된 상태다. 정부는 208일치 비축분을 확보하고 있어 단기 충격은 방어 가능하지만, 봉쇄가 장기화할 경우 우회 루트 확보에 따른 운송료 상승과 수급 다변화 부담이 동시에 확대될 전망이다. 업계에서는 우회 루트 전환 시 수송원가가 80% 폭등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150달러 경고”… 시장은 더 큰 충격 예고
시장에서는 유가 상승세가 계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골드만삭스는 최근 투자자 노트에서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원유 흐름이 개선되지 않을 경우 국제유가가 이달 말 배럴당 150달러까지 치솟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골드만삭스는 “호르무즈 해협의 석유 생산량이 3월 내내 낮은 수준을 유지한다면, 특히 정제유 가격을 비롯한 원유 가격은 2008년과 2022년 최고치를 넘어설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전쟁이 완화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다. 이란은 사망한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의 뒤를 이을 최고지도자로 그의 차남 모즈타바 하메네이를 선출했다. 모즈타바는 대미 강경파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앞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이 이란 후계구도에 관여해야 한다며 하메네이의 아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힌 터라, 미국의 대이란 공세 수위는 더욱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미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클레이턴 시글 선임연구원은 “시장이 트럼프 행정부에 부여했던 유예기간이 지난 주말로 끝났다”고 분석했다. 그는 “하루 2,000만 배럴의 공급 부족이 전 세계 원유 시장의 균형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고,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며 “트럼프 대통령은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는 매우 가능성 낮은 전망”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