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소비재 기업들이 필리핀에서 단숨에 1,640만 달러(약 230억원) 규모의 수출 계약을 따냈다. 이재명 대통령의 국빈 방문이라는 외교 무대가 기업들에게는 ‘비즈니스 골든타임’으로 전환된 셈이다. 특히 K-뷰티와 K-푸드에 대한 현지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업계에서는 필리핀을 동남아 진출의 전략적 거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4일(현지시간) 필리핀 마닐라에서 개최된 ‘한-필 비즈니스 파트너십’ 행사에서 한국 기업 52개사와 필리핀 바이어 70개사가 만나 총 11건의 수출 계약을 현장에서 체결했다고 밝혔다. 이번 방문을 계기로 정부 차원 10건과 민간 차원 7건을 합쳐 총 17건의 업무협약(MOU)이 맺어지면서, 양국 경제협력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원전·조선서 삼성·HD현대까지… ‘총력전’ 펼친 재계
이번 협력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분야는 원전과 조선이다. 한국수력원자력과 한국수출입은행은 필리핀 최대 전력기업 메랄코와 함께 신규 원전 건설을 위한 사업·재무 모델을 공동 개발하고 인력을 양성하기로 했다. 필리핀이 탄소중립 에너지 전환을 서두르면서, 한국의 원전 기술이 핵심 솔루션으로 부상한 것이다.
조선 분야에서는 HD현대중공업이 필리핀 기술교육개발청(TESDA)과 손잡고 현지 조선 인력 양성에 나섰다. HD현대는 수빅조선소에서 지난해 9월 마르코스 대통령이 참석한 강재 절단식을 계기로 필리핀 현지 생산을 본격화해왔다. 삼양식품은 현지 유통사 S&R과 MOU를 맺어 필리핀 전역으로 K-푸드 공급망을 확대하기로 했으며, 삼성전기는 MLCC 생산공장 대규모 증설을 추진 중이다.
FTA 효과 톡톡… 투자 순위 10위→4위 ‘급부상’
한국 기업들의 필리핀 러시는 2024년 12월 한-필 FTA 발효 이후 가속화됐다. 한국의 대필리핀 투자 순위는 2023년 10위권에서 2025년 4위로 급상승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필리핀이 ASEAN 최대 소비 시장 중 하나이면서 니켈·코발트 같은 핵심 광물의 주산지라는 점에서 전략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분석했다.
김정관 산업부 장관은 현장에서 “K-뷰티, 식품 등 한국 제품의 인기가 빠르게 확산하고 있는 만큼 필리핀을 거점으로 동남아 시장에서 다양한 비즈니스 기회를 창출할 수 있도록 우리 기업의 시장 진출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기존의 장관급 경제협력위원회를 보완해 상설 협의체를 신설하고, 주요 현안을 상시 관리하는 ‘실시간 대응형 경제외교’로 전환할 방침이다.
“단기 수출 아닌 중장기 생산기지 구축”
전문가들은 이번 협력이 단순한 수출 실적이 아니라 중장기 산업 기반 조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인력 양성, 기술 협력, 공동 탐사·개발 등의 MOU가 집중적으로 체결된 것은 필리핀을 ‘생산 거점’으로 육성하겠다는 전략의 반영이라는 해석이다.
이번 비즈니스 포럼에는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정기선 HD현대 회장, 류진 한국경제인협회 회장 등 주요 기업 총수들이 대거 참석했다. 대기업들의 이례적인 총수 동반 참석은 필리핀 시장의 장기적 성장 가능성에 대한 업계의 높은 기대감을 시사한다. 산업부는 ‘한-필 경제협력 위원회’를 통해 이번 협력이 실질적인 사업 기회로 이어지도록 후속 조치를 이어갈 계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