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Elliott Management)에 약 1600억원을 지급하라는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을 취소시키는 데 성공했다. 영국 고등법원은 23일 국민연금공단을 국가기관으로 전제한 원 중재판정의 해당 부분을 취소하며 한국 정부의 손을 들어줬다.
2023년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가 내린 약 1556억원(1억782만달러) 규모의 배상 판정은 이번 판결로 사실상 근거를 잃었다. 사건은 새로운 기준 아래 중재절차로 환송됐다. 국제법 전문가들은 영국 법원에서 중재판정 취소 인용률이 불과 3%에 머무는 현실을 감안할 때 이례적인 결과로 평가한다.
이번 승소는 지난해 11월 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와의 외환은행 매각 관련 ISDS에서 약 4000억원 규모의 배상 책임을 피한 데 이은 두 번째 역전극이다. 법무부는 정부가 엘리엇 측 소송비용의 6분의 1 수준만 들이고도 성과를 냈다고 밝혔다.
2015년 삼성 합병 논란, 8년간의 법정 공방으로
이 사건의 출발점은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이다. 당시 엘리엇은 합병 비율이 삼성물산 주주에게 불리하게 설계됐음에도 국민연금공단이 찬성표를 행사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경영권 승계에 기여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2018년 7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근거로 ISDS를 제기했으며, 청구 금액은 7억7000만달러(약 1조1117억원)에 달했다.
2023년 PCA는 청구액의 약 7%인 1556억원에 대해 한국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이에 한국 정부는 PCA가 한·미 FTA상 관할권 없이 사건을 판정했다며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취소 소송을 냈다. 2024년 8월 1심이 소송을 각하했으나, 2025년 7월 영국 항소법원이 이를 파기하고 고등법원으로 환송했다. 이번 재심이 그 결과다.
영국 법원 “국민연금공단, 국가기관 해당 않아”
영국 고등법원은 세 가지 근거를 들어 국민연금공단을 국가기관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국민연금공단은 정부와 별개의 법인격을 보유하고 ▲공적연금 운용은 국방·치안 같은 국가의 핵심 기능이 아니며 ▲일상적 의사결정이 정부에 완전히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법원은 청와대와 보건복지부가 합병 관련 국민연금공단 의사결정에 개입한 행위 자체는 FTA상 ‘관련성 있는 조치’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원 중재판정 전부가 취소된 것은 아니며, 사건은 국민연금공단의 독립성을 전제로 엘리엇의 실제 손해와 인과관계를 다시 따지는 중재절차로 넘어간다.
론스타 이어 연속 ISDS 역전…향후 과제도 남아
국제법 전문가들은 이번 판결이 한국 정부의 ISDS 대응 역량을 입증한 동시에 유사 사건에 중요한 선례로 작용할 수 있다고 분석한다. 시장에서는 1600억원 규모의 국고 유출 리스크가 일단 봉쇄됐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분위기다.
정성호 법무부 장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국민연금을 지켜낸 소중한 판결”이라며 “환송 중재 절차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ISDS 대응 체제 강화를 위한 법률 제정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환송된 중재절차에서 일부 배상이 재차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법조계에서는 최종 결말을 판단하기엔 이르다는 시각도 유지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