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을 그만두는 날, 퇴직금을 받지 못하는 근로자가 여전히 많다. 임금 체불의 40%가 퇴직금이다. 회사가 퇴직금을 사내 운영자금으로 쓰다가 유동성 위기에 처하면 근로자는 받을 돈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돼 왔다.
노사정이 6일 모든 사업장에 퇴직연금 도입을 단계적으로 의무화하고, ‘기금형 퇴직연금’을 본격 도입하기로 합의했다. 2005년 제도 시행 이후 20년 만의 전환점이다. 현재 431조7천억원 규모로 성장한 퇴직연금 시장이 구조적 변화를 맞게 됐다.
하지만 영세·중소기업의 부담을 어떻게 덜어줄지, 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 등 사각지대를 어떻게 해소할지가 핵심 과제로 남았다. 기금형을 둘러싼 오해도 불식시켜야 한다.
20년 만의 대전환, 무엇이 바뀌나
이번 합의의 핵심은 두 가지다. 첫째, 모든 사업장에 퇴직급여의 사외적립을 단계적으로 의무화한다. 둘째, 확정기여형(DC형)에 기금형 퇴직연금을 선택지로 추가한다.
퇴직금 제도에서는 회사가 퇴직 시점에만 지급하면 되지만, 퇴직연금으로 전환되면 사업장이 의무적으로 수탁법인에 적립해야 한다. 회사가 도산해도 근로자는 퇴직금을 받을 수 있는 구조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기업 도산으로 퇴직금을 받지 못한 사례가 속출하면서 2005년 이 제도가 도입됐지만, 강제성이 없어 영세 사업장의 회피가 심했다.
기금형 퇴직연금은 전문 수탁법인이 퇴직금을 통합 운용해 수익을 배분하는 방식이다. 기존 퇴직연금이 연평균 2%대의 저조한 수익률로 비판받아 온 반면, 기금형 상품인 ‘푸른씨앗’은 3년 누적 수익률 26.98%를 기록했다. 시장에서는 기금형이 경쟁력 저하를 겪고 있는 기존 퇴직연금 시장의 ‘메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극과 극의 도입률, 중소기업이 문제
2024년 기준 퇴직연금을 도입한 사업장은 43만5천곳이다. 하지만 기업 규모별로 극명한 차이가 드러난다. 300인 이상 사업장의 도입률은 92.1%에 달하는 반면, 5인 미만 사업장은 10.6%에 불과하다.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사외적립이 재정 부담으로 이어져 도입을 기피해 왔다. 내부 운용자금을 사외에 적립하면 사업비와 대출 이자 부담이 커지기 때문이다. 자본시장 전문가들은 “단계적 의무화라고 해도 현시점에서 기업 부담은 여전할 것”이라며 “정부 지원이 관건”이라고 분석했다.
노동부는 “영세·중소기업 실태 조사를 최대한 빨리 진행하고, 이를 토대로 지원 방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과태료나 이행강제금 같은 제재 수단이 명시되지 않아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있다.
기금형 오해 불식과 사각지대 해소가 과제
최근 국민연금의 ‘환율 방어용’ 기금 운용 논란이 불거지면서 ‘퇴직연금 기금화’ 반대 청원 동의가 1만명을 돌파했다. 일시불 수령 폐지, 전면 강제 도입 등 사실이 아닌 우려가 확산된 영향이다.
노사정은 이번 합의문에 “중도인출 및 일시금 수령 등에 대한 근로자의 선택권은 기존과 같이 보장한다”고 명시했다. 또 “수탁법인은 오직 가입자의 이익만을 위해 기금을 운용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기금형은 어디까지나 선택지이며, 기존 방식도 유지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노동계는 이번 합의를 환영하면서도 사각지대 해소를 주문했다. 한국노총은 “특고·플랫폼 노동자 등 퇴직연금 사각지대 해소와 관련된 과제는 향후 사회적 협의체 논의를 통해 심도 있게 다뤄질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민주노총 관계자도 “11개월 일 시키고 자르는 등 퇴직금을 주지 않으려는 사업주 측 꼼수에 대한 대안 마련이 과제”라고 지적했다.
금융 전문가들은 “현재는 노사정이 큰 방향만 합의한 것이니 디테일이 중요하다”며 “기금형에서 수익률 제고가 가능하도록 수탁법인 지배구조를 설계하는 부분이 가장 중요해 보인다”고 조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