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주유소 앞 전광판에 표시된 휘발유 가격이 리터(L)당 1945원. 4년 만에 다시 찾아온 ‘1900원대’ 기름값에 운전자들의 한숨이 깊어지고 있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라고 입을 모은다. 현재 급등한 국제유가가 본격 반영되는 이달 말부터 유가가 한 차례 더 뛸 수 있다는 경고다.
9일 한국석유공사 유가정보시스템 오피넷에 따르면 전날 기준 서울 휘발유 평균 가격은 L당 1945.73원, 경유는 1967.39원을 기록했다. 중동 사태가 발발한 지난달 28일(휘발유 1749.65원, 경유 1664.21원)과 비교하면 불과 열흘 새 각각 196.08원, 303.18원씩 폭등한 수치다. 전국 평균도 휘발유 1895.34원, 경유 1917.77원으로 하루 사이 5~7원씩 오르며 상승세가 계속되고 있다.
문제는 이 가격에 국제유가 급등분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통상 국제유가 변동이 국내 주유소 판매가격에 반영되기까지는 2~3주가 소요된다. 지난 7일 뉴욕상품거래소에서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 가격은 배럴당 90.90달러로 전일 대비 12.21% 급등했고, 주간 기준으로는 35.63% 상승해 1983년 선물 거래 시작 이후 최대 상승률을 기록했다. 브렌트유 역시 28% 급등하며 배럴당 92.69달러에 마감했다.
하루 만에 200원 오른 ‘이상 급등’의 배경
흥미로운 점은 국내 유가가 국제유가보다 먼저 반응했다는 사실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이 시작된 2월 28일 이후 국내 유가는 불과 하루 만에 급등세를 보였다. 업계에서는 주유소들이 국제 정세 악화를 예상해 선제적으로 가격을 올렸고, 일부에서는 과도한 인상이 이뤄졌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정부가 “중동 사태를 틈탄 과도한 가격 인상”에 대해 무관용 원칙으로 대응하겠다고 밝힌 것도 이런 맥락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앞으로다. 현재 배럴당 90달러를 넘어선 국제유가가 본격적으로 국내에 반영되는 이달 말부터 유가는 추가 상승할 가능성이 크다. 업계에서는 3월 말부터 현재의 고유가가 반영되면서 2000원대 진입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2022년 악몽 재현되나…물가 3%대 우려 커져
기름값 급등은 단순히 주유 부담을 넘어 전체 물가를 끌어올리는 뇌관이 될 수 있다. 소비자물가지수에서 석유류 6개 품목이 차지하는 가중치는 46.6으로, 농산물(38.4)이나 채소류(14.3)보다 높다. 여기에 석유류는 물류비와 생산비를 끌어올려 전방위적 물가 상승을 촉발하는 특성이 있다.
실제로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국제유가가 배럴당 120달러를 넘어서자 국내 소비자물가는 9개월 연속 5% 이상 상승했다. 당시 6월 전체 물가 상승률 6.0% 가운데 1.58%포인트를 석유류가 끌어올렸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이번에도 전쟁이 장기화하고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될 경우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 내외를 기록하며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1%포인트 높아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동안 6개월 연속 2%대를 유지해 온 소비자물가가 3월부터 3%대로 치솟을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화하는 셈이다. 한국은행도 “중동 상황에 영향을 받아 국제유가가 상승하면서 비용 측면에서의 물가 상방 압력이 커지고 있다”며 불확실성을 경고했다.
정부 대책, 얼마나 통할까
정부는 유가 급등에 대응해 최고가격제 도입 검토, 폭리·매점매석 단속 등 긴급 대책을 내놨다.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대외 충격이 석유류 가격 상승 등 민생 부담으로 전이되지 않도록 면밀히 관리하겠다”고 강조했다. 먹거리 물가 안정을 위해 계란·고등어·김 등에 최대 50% 할인지원을 지속하고 미국산 신선란 공급도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최고가격제는 일시적 효과는 있을 수 있지만, 국제유가 자체가 고공행진을 지속하면 공급 차질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중동 정세가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향후 몇 달간 국민들의 지갑 사정이 크게 달라질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