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 수준의 요리 기구를 만들면서 정작 우리 주방에서는 제대로 쓰지 못하는 상황.”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이 2월 17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한국 AI 산업의 구조적 모순을 비유한 표현이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엔비디아 GPU에 탑재될 고대역폭메모리(HBM)를 생산해 해외로 수출하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대규모 AI 연산 클러스터를 충분히 구축하지 못하는 현실을 꼬집었다.
김 실장은 “AI는 이제 ‘코딩’이 아닌 ‘전기’의 전쟁”이라며 AI 경쟁의 본질이 바뀌었다고 진단했다. 기술 격차가 빠르게 좁혀지는 AI 시대에 희소한 자원은 더 이상 코드가 아니라 GPU, 메모리, 전력, 송전망 같은 물리적 자원이라는 분석이다. 실제로 세계적 벤처투자가 마크 앤드리슨의 분석에 따르면, AI 기업의 비용 구조에서 R&D 비용보다 전기료와 칩 사용료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반도체 강국의 치명적 약점, 전력 인프라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메모리 반도체 생산 능력을 보유했지만, 이를 국내에서 활용할 에너지 인프라는 부족하다. 김 실장은 “한국에 전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AI가 요구하는 규모와 속도로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느냐”라며 발전 설비 총량 확대뿐 아니라 송배전망, 입지, 인허가 속도까지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단순한 에너지 정책 차원을 넘어선다. 정부가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에 따라 대형 원자력발전소 2기 건설을 계획대로 추진하기로 한 배경에는 AI 데이터센터 등 성장동력 산업의 폭발적 전력 수요가 자리한다.
전력망, 지역 민원에서 국가 안보로
김 실장은 “전력망은 더 이상 지역 민원의 대상이 아니라 국가 전략 인프라로 격상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존 송전탑 입지 선정 과정에서 반복된 지역 갈등을 넘어, 전력 생산 지역이 산업 혜택을 함께 누리는 ‘지산지소(지역생산 지역소비)’ 원칙을 제시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전력망을 안보 인프라로 보고 국가 재정을 투입하되, 민관 협력을 제도화하고 안정적 운영을 책임질 거버넌스를 구축해야 한다고 밝혔다. 서해안 초고압 직류 송전(HVDC) 같은 에너지 고속도로 사업이 진행 중이다.
제12차 전기본이 ‘지능 생산국’ 분기점
김 실장은 “AI는 더는 기술 정책의 일부가 아니라 산업·에너지·재정·국토 전략이 함께 움직여야 하는 문제”라며 제12차 전기본과 전력산업 구조개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이를 “대한민국이 ‘지능 수입국’으로 남을지, ‘지능 생산국’으로 도약할지 가르는 분기점”으로 규정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별도로 AI 로봇 시대 대응책으로 창업 중심 정책을 제시한 것과 맞물려, 현 정부는 하드웨어 인프라 확충(전력·반도체)과 소프트웨어 생태계 조성을 동시에 추진하는 투트랙 전략을 펼치고 있다.
“지능은 빠르게 공유되고 복제된다. 모델은 추격된다. 코드는 퍼진다. 하지만 발전소와 송전망, 반도체 공장은 하루아침에 복제되지 않는다.” 김 실장의 이 발언은 AI 시대 경쟁력의 본질이 소프트웨어가 아닌 물리적 인프라 확보 속도에 달려 있음을 시사한다. 한국이 세계 최고의 메모리를 만들면서도 그것을 활용할 ‘주방’을 갖추지 못한다면, 부가가치는 모두 해외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는 경고다.

늦어져도 핵발전은 안된다